민중시보 ()

근대사
문헌
1935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김문준 등이 재일 조선인을 대상으로 창간한 한국어 신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1935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김문준 등이 재일 조선인을 대상으로 창간한 한국어 신문.
개설

발간동인은 대표간사인 김문준(金文準)을 비롯해 김경중(金敬中, 阪神소비조합회장), 정재영(鄭在英, 대동소비조합회장), 김달환(金達桓, 泉州일반노동조합), 박봉주(朴鳳柱, 神戶합동노동조합, 阪神간 재류조선인단체연합기성회), 정태중(鄭泰重, 京都조선인친목회집행위원장) 등이다.

이외에 홍순일(洪淳日, 신간회 대판지회), 김광수(金光洙, 조선일보 대판지국장), 김정국(金廷國, 동아일보 대판지국장), 이호태(李鎬泰, 매일신보 대판지국장), 박윤석(朴尹錫, 중앙일보 대판지국장) 등이 참여하였다. 발간 당시에는 월 2회 발간되었고, 4×6판 8면으로 가격은 10전이었다. 그러나 7월부터 발간 회수는 월 3회로 늘어났다.

내용 및 변천

이 신문은 1935년 5월자로 발표한 발행취지문을 통해 ‘일본 간사이(關西) 지역에 거주하는 30만 조선인의 독자적인 언론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할 것임을 밝혔다. 발행취지문과 함께 발표된 강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일본 내에 거주하는 조선인 민중의 생활진상과 여론을 보도하는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언론기관으로서의 존립과 성장발전을 기한다.

  2. 우리는 일본 내에 거주하는 조선인 민중의 생활개선과 문화적 향상을 촉진함을 기한다. 1. 우리는 일본 내에 거주하는 조선인 민중의 생활권 확립과 그 옹호 신장에 투자할 것을 기한다.

1929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 해산된 이후 대판을 비롯한 관서 지방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민족문제와 아울러 생활상의 문제에 대해서도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정주 조선인의 수가 늘어가면서 취업문제, 주택문제, 교육문제 등은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당면과제였던 것이다.

또한 1934년부터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 당국의 내선융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34년 10월에 ‘조선인이주대책요목(朝鮮人移住對策要目)’이 각의에서 결정되고, 이어서 1936년부터 전국에서 협화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대판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앞서서 1934년부터 대판부내선협화사업조사회가 설치되어 이를 중심으로 협화사업이 전개되었다.

1934년부터 대판에서는 지역마다 10∼30세대씩 조선인 세대를 묶어 경찰이나 부(府) 사회과가 생활개선을 지도하는 교풍회(矯風會)를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하는 사업의 중심내용은 민족적 관습의 폐지나 일본식 복장착용법 보급, 일본어 사용, 일본 국가(國歌) 제창지도, 국체(國體) 관념보급 등이었다. 또한 일본 당국은 이러한 사업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조선요리집이나 식당에 대한 감시를 더욱 철저히 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발맞추어 생활권 옹호는 물론이고 민족 관습의 보존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 당국이 전개하는 내선융화 사업(또는 협화사업)으로 인해 조선인간에 불화와 파쟁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인의 대동단결을 주장하는 논설과 기고문을 게재했다.

이 신문의 주요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주 조선인의 생활권을 옹호하기 위한 내용이다. 도일 후 일자리와 주택을 구하는 문제부터 공동구매 요령, 소비조합 이용법, 법률문제, 건강상식 등 일본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여러 사항을 문답식이나 기고의 형식을 통해 상세히 보도했다. 특히 차가쟁의에 대해서는 상세한 보도기사를 통해 일본당국과 일본인에게 반성을 촉구했다.

둘째, 반봉건적 유습 철폐이다. 이를 위해 미신 타파와 조혼 금지 등에 관한 글을 실었다. 셋째, 조선인의 대동단결을 도모하고 동화(同化) 단체를 배격하는 내용이다. 그 외 고국 소식과 조선인의 강제 송환이나 경찰의 탄압을 고발하는 내용도 빠질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 신문은 이러한 기사의 근저에 민족의식을 깔고 있었다. 또한 이 신문의 활동으로 인해 재일조선인의 단결이 공고화되는 결과를 낳았으므로 일본 당국의 탄압을 피하기 어려웠다. 또한 한글신문인 민중시보가 조선인 어린이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효과를 가져왔으므로 이 신문의 발간은 내선융화를 지향하는 일본 당국에게 제거의 대상이었다.

1936년 5월 22일, 민중시보를 창간했으며 대판거주 조선인들의 지도자였던 김문준이 사망하자 이후에는 민중시보 기자였던 이신형(李信王行)이 운영을 맡았다.

그러나 1936년 9월 25일 특고경찰은 ‘좌익조선인의 지원 아래 운영되며, 민족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민족운동의 주체를 결성하는데 광분’한다는 이유를 들어 민중시보의 주간인 이신행과 한진섭(韓辰燮), 이면호(李眠鎬)를 비롯한 기자들을 모두 검거하고 9월 21일자, 제27호로 폐간 처분했다.

민중시보의 폐간 이후, 조선인의 단합과 이익을 도모하는 여러 단체에 대한 탄압도 이어져 이후부터 조선인 자신의 자주적 활동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특고외사월보(特高外事月報)』(1936.11)
『朝鮮硏究資料叢書』(朴慶植 編, 三一書房, 1983)
『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朴慶植 編, 三一書房, 1975)
「1930年代中期の在日朝鮮人運動」(外村大, 『朝鮮史硏究會論文集』28, 199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