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시대 변한(弁韓)의 땅으로 뒤에 가야(加耶)에 속하였으나 신라 법흥왕 때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 밀성군으로 고쳐 밀진(密津)·상약(尙藥)·오구산(烏丘山)·형산(荊山)·소산(蘇山) 등을 영현(領縣)으로 하였으며 양주(良州)에 속하였다.
995년(성종 14) 밀주자사(密州刺使)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지밀성군사(知密城郡事)로 바꾸어 창녕(昌寧)·청도(淸道)의 2군과 현풍(玄豊)·계성(桂城)·영산(靈山)·풍각(豊角)을 속현으로 하였다. 1194년(명종 24)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가 동경(東京)에서 반란을 일으킨 김사미(金沙彌)를 밀성의 저전촌(猪田村)에서 격파하여 이를 평정하였다.
1275년(충렬왕 1) 조천(趙仟) 등이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어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낮추었고, 다음해 소복별감(蘇復別監)을 두어 계림부(鷄林府)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밀성현령(密城縣令)으로 하였으며, 1390년(공양왕 2) 밀양부(密陽府)로 승격시켰다. 조선 태조 때 밀성군으로 하였다가 뒤에 밀양부로 고쳤다.
옛 이름인 ‘추화’나 ‘밀성’은 모두 ‘수읍(首邑)’ 또는 ‘대읍(大邑)’이라는 뜻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