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후(德厚), 호는 의재(毅齋) · 삼암(三巖). 옥천(沃川)에서 태어나 주계(朱溪 : 현, 전북특별자치도 무주)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충좌위 부사직(忠佐衛副司直) 박충현(朴忠賢)이며, 어머니는 의흥박씨(義興朴氏) 화순현감(和順縣監) 박준(朴埈)의 딸이다. 삼종숙(三從叔)인 박사종(朴嗣宗)의 문인이다.
박이겸이 20세 되던 해에 영남을 주류하며 당시의 거유들을 찾아뵈면서, 조식(曹植)에게서는 출처(出處)의 의리를, 정구(鄭逑)에게서는 성리설(性理說)과 예악형정설(禮樂刑政說) 등을 듣고서는 집에 돌아와 삼암(三巖)에 정자를 짓고 후생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외가를 따라 성주(星州)로 이사하여 살기도 하면서 무주(武朱)와 성주에서 각기 향천(鄕薦)을 입었으나 벼슬에 나가지는 못하였고, 그의 나이 33세 때 암행어사 목장흠(睦長欽)의 천거로 정릉참봉(貞陵參奉)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중용』과 『대학』에 특히 조예가 깊었으며, 그에서 얻어진 공부를 한글로 「입덕문가(入德門歌)」라는 가사(歌詞)로 옮겨 누구나 쉽게 학문을 터득하도록 읽혔으며, 또 세속이 술을 너무 쉽게 마시는 것을 금지하려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어 이의 폐단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증직되었고, 무주의 압계서원(鴨溪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삼암유고(三巖遺稿)』 2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