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 ()

정치
인물
제8·9·10·12·14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7년
사망 연도
1997년
본관
밀양(密陽)
출생지
경상남도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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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제8·9·10·12·14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개설

본관은 밀양(密陽). 아버지는 박재하(朴在夏)이다. 경상남도 밀양 출생. 8·9·10·12·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27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만석군 대지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서울 휘문고를 졸업하고, 1949년 연세대 문과를 수료하였으며, 1983년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명예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휘문고를 졸업한 후 밀양 제일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조선어학회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교장에 의해 고발되자 피신해서 노무자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밀양에서 동혈건설단(同血建設團)이라는 청년단체를 조직하였으며, 대학재학시에는 연극반을 조직하여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반공청년단 밀양단부 위원장을 지내다가, 27세 때인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래, 이후 4·5·6·7대 총선에 계속하여 출마하였지만 8대 총선에 가서야 당선되어 원내에 진출하였다.

1963년민정당 밀양지구당 위원장이 되고, 1965년 민중당 밀양지구당 위원장을 거쳐, 1967년 신민당 경상남도13지구당 위원장, 신민당 정책위원을 역임하였다.

그 뒤 1970년 신민당 경상남도당위원장이 되고, 이듬해 신민당 지도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당 공천으로 밀양에서 네번째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지만 이듬해 10월유신으로 인하여 1년 3개월 만에 의원직을 잃었다.

그러나 유신 후 실시된 1973년의 제9대 선거와 1979년 제10대 선거에서는 신민당 공천으로 창녕·밀양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연이어 당선되었다. 한편, 1976년에는 신민당정책심의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신민당내 계보는 김재광(金在光) 계열로 분류되었다.

1980년에 전두환(全斗煥) 등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정치활동을 규제당하여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였고, 11대선거에도 출마하지 못하었다. 그러다가 1984년에 정치규제가 해금되어 이듬해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한당 공천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곧 민한당을 탈당하고 정치규제에서 해금된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계 야권연합세력이 결성한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으며, 1984년 반독재 단일투쟁기구로서 결성되었던 민주화추진협의회에도 가입하여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87년 민주당 정무위원, 1988년 민주당 밀양지구당위원장, 한일의원연맹 한국대표, 한·파프아뉴기니 의원친선협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13대 총선에서는 낙선하였다.

그 뒤 1991년 신민당 최고위원과 당무위원, 민주당 당무위원 등을 거쳐, 1992에서 1996년까지 제14대 국회의원(전국구, 민주당)을 지냈다.

이듬해는 민주당 전당대회 의장이 되었고, 1993년 한·인도의원친선협회장과 민주당 상임고문을 거쳐, 1995년에는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

저서로는 『나는 의회민주주의(議會民主主義)를 위하여 이렇게 싸웠다』가 있다.

참고문헌

『나는 의회민주주의(議會民主主義)를 위하여 이렇게 싸웠다』(박일,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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