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계우(啓宇), 호는 나암(羅巖)·침천(枕泉). 경상북도 예천 출신. 아버지는 박득녕(朴得寧)이다.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고, 20세에 족숙(族叔) 박기령(朴箕寧)을 사사하였다. 20세 전후에 문장과 학문을 성취하여 장래가 촉망되었다.
1872년(고종 9)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이듬해 진사시에 또 장원하였다. 그러나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서(性理書)와 경서(經書) 등을 연구하는 한편, 예악(禮樂)·음양(陰陽)·복서(卜筮)·지리·의약 및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선배로는 권연하(權璉夏), 동배로는 김흥락(金興洛)·권세연(權世淵)·이만도(李晩燾) 등과 친밀하였다. 후배로는 곽종석(郭鍾錫)·장화식(張華植)·권상규(權相圭) 등과 왕복이 잦았다.
1882년 국경(國慶: 왕세자의 冠禮)으로 과거를 실시하자, 친명(親命)으로 응시하러 상경하였다. 그러나 매관매직의 정국에 싫증을 느껴 그 날로 도성을 나오면서 시를 지어 세상에 나서지 않겠다는 자신의 뜻을 밝혔다.
1884년 복제 개혁의 영이 내리자, 권경하(權經夏)·황재영(黃在英) 등과 문산사(文山社)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고례(古禮)의 수호에 앞장섰다. 또 향시의 시관이 되기도 하고, 향교의 교수직을 맡아 학자와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 향중의 중요한 일은 대부분 박주대에게 자문하여 처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예천 사림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신병으로 인해 아우 박주학(朴周學)을 대신 보내고 자신은 창의통유문(倡義通諭文)을 지어 유문(儒門)에 보냈다. 그리고 안동 의병장 권세연을 비롯하여 이강년(李康秊)·서상렬(徐相烈) 등 의병장을 지원하였다.
1898년 예천군수 이인성(李寅聲)을 도와 교궁(校宮)을 개혁하였으며, 1901년 예천군에서 향약을 베풀 때 약정(約正)으로 추대되었다. 1910년에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자, 두문불출하고 시가로써 비분한 심회를 표현하였다.
배일사상을 문인·자제들에게 심어 주어, 특히 박주대의 영향을 받아 항일운동에 활동한 이로는 생질 김대락(金大洛), 생질서 이상룡(李相龍), 이중업(李中業) 등이 있다. 또, 박주대는 가재를 털어 군자금을 대주는 등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박주대의 학문하는 태도는 명예를 구하는 일보다 실천궁행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문하에 김소락(金紹洛), 사간(司諫) 권박연(權博淵), 진사 황재진(黃在鎭) 등 90여 명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박주대는 또 아버지 박득녕이 써오던 『역서일기(曆書日記)』를 유지(遺志)를 받들어 죽을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썼다. 이는 가법으로 전승되어, 6대 122년간의 유례가 없는 사가(私家)의 일기가 되어 야사적(野史的)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저서로는 『나암유고(羅巖遺稿)』·『나암수록(羅巖隨錄)』·『문음보(文蔭譜)』·『심성촬요오도(心性撮要五圖)』가 있다. 편서로는 『유문경제(儒門經濟)』·『성학십도해설(聖學十圖解說)』이 있다.
묘는 예천 조비동(鳥飛洞)에 있으며, 이만규(李晩煃)가 묘지명을, 곽종석이 묘갈명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