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월 『동명(東明)』 18호에 발표되었다. 작자의 초기 작품으로 전편이 5연 22행으로 되어 있다.
“흐름 위에/보금자리 친/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나의 魂(혼)…….//바다 없는 곳에서/바다를 戀慕(연모)한 나머지에/눈을 감고 마음 속에/바다를 그려보다/가만히 앉아서 때를 잃고……//옛 城(성) 위에 발돋음하고/들너머 山(산)너머 보이는 듯 마는듯/어린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다/해지는 줄도 모르고―//바다를 마음에 불러 일으켜/가만히 凝視(응시)하고 있으면/깊은 바닷소리/나의 피의 潮流(조류)를 통하여 오도다.//茫茫(망망)한 푸른 海原(해원)―/마음 눈에 펴서 열리는 때에/안개같은 바다의 香氣(향기)/코에 서리도다.”
이 작품의 제재가 된 것은 흐름이며 바다다. 그러나 그것은 물리적인 차원의 바다가 아니다. 다분히 정신적인 성향의 바다다. 이것은 곧, 이 작품이 사변적인 세계를 지녔음을 뜻한다. 이 작품이 쓰일 무렵 한국 시단에 명상적인 시가 발표된 예는 아주 드물었다. 그런데 오상순의 이 작품은 그 예외였다.
이 작품의 이런 단면은 당시 우리 시단의 상황으로 보아 이색적인 것이었다. 이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오상순은 『폐허(廢墟)』 동인이었다. 그 창간호에 오상순은 폐허파의 문학 선언에 해당되는 「시대고(時代苦)와 희생」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 2호에는 「힘의 숭배(崇拜)」 이하 열일곱 편의 시를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그 말들은 적지 않게 생경했다. 또한 그 부피 역시 아주 짧았다.
그리하여 『폐허』 동인이었을 때 시인으로서 오상순의 위치는 넉넉하게 인정되지 못했다. 「방랑의 마음」이 발표되고 난 다음 이런 시정이 크게 바뀌었다. 즉, 「방랑의 마음」은 시인으로서 오상순의 위치를 확실하게 굳혀준 작품이다. 또한 작가의 생활도 이 시의 제목과 비슷했다.
오상순은 본래 기독교의 목사였으나 얼마 안 되어 종교를 불교로 바꾸었다. 실제 생활에서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떠돌아다녔다. 평생 집 한 칸을 마련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결혼 생활도 하지 못했다. 「방랑의 마음」은 이런 오상순의 생활을 유추하게 하는 점으로도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