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조선초 무신 배극렴의 무덤으로, 직사각형 형태의 봉분을 비롯하여 상석, 향로석, 문인석, 망주석, 산양, 장명등 등으로 이루어졌다. 1994년 12월 30일에 충청북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성주배씨(星州裵氏) 종중에서 관리한다.
배극렴(裵克廉, 1325~1392)의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자는 양가(量可)이며, 호는 필암(筆菴) 또는 주금당(晝錦堂)으로,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진주목사(晋州牧使)·화령부윤(和寧府尹)·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등을 지냈다. 1376년(우왕 2) 진주 도원수(晋州都元帥)로 반성현(班城縣)에서 왜구를 격퇴한 이후 정치적 성장을 거듭하였으며, 1388년(우왕 14)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을 도와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다.
그러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관여했다는 이유로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폄하되었다. 아들이 없어 누이의 외손인 안순(安純)이 상주(喪主)가 되었다.
묘소는 실전되어 오다가 조선 말기에 찾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소 입구에는 1888년(고종 25)에 세운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박성양(朴性陽)이 짓고 이은용(李垠鎔)이 썼으며 제전(題篆)은 안병주(安秉宙)의 글씨다.
묘의 형태는 직사각형으로 봉분 아랫 부분에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다. 그 밖에 문인석, 망주석, 산양, 장명등 등의 석물은 2002년 도난을 당해 새로 세운 것이다. 송산리 마을에는 배극렴의 재실인 경절재(景節齋)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