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 출신으로, 호는 근촌(芹村), 본관은 수원(水原). 소년시절부터 같은 고향 출신인 김성수 · 송진우와 친한 사이로 교우하였다.
1915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6년 중앙학교 교사에 부임하였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에서 수학하다가 1919년 2월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한 후 단장이 되었다. 그 당시 학생대표 11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이로 인해 경찰에 체포되어 1년간 복역하였다.
1924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해 조선일보사 상무취체역 겸 영업국장이 되었고, 1927년 하와이에서 열린 세계기독교청년연합회 주최 제2차 태평양회의에 대표로 참석했다. 1927년 이후에는 신간회에 참여했으며, 1928년 조선일보사 주필 안재홍(安在鴻)의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조선일보사를 떠났다.
1929년에는 일본에서 열린 제3차 태평양회의에 대표로 참석했으며, 1932년 홍문사(弘文社)를 설립해 월간지『동방평론(東方評論)』을 간행하였다.
1937년 동아일보사 사장이 되었고, 1940년 조선총독부가 『동아일보』의 폐간을 결정했을 때, 끝까지 폐간계(廢刊屆)에 도장을 찍지 않아 1개월간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원세훈(元世勳) · 조병옥(趙炳玉) 등과 조선민족당을 발기하였고, 조선민족당을 이끌고 한국민주당에 합류한 뒤 총무가 되었다. 1946년 미군정하에서 민주의원 의원, 입법의원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초대 법제사법위원장을 지냈다.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으로 건국 초기의 국가대강을 수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1961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