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회 ()

연극
단체
1920년대 중반에 신극운동을 목적으로 잠깐 등장했다가 실제 공연실적 없이 사라진 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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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0년대 중반에 신극운동을 목적으로 잠깐 등장했다가 실제 공연실적 없이 사라진 극단.
연원 및 변천

백조회(白鳥會)는 토월회에서 탈퇴한 신극운동의 선구자들을 망라해 새로이 이상적 신극운동을 해보겠다는 뜻으로 조직되었다. 이를 위해 1926년 2월 24일에 이백수(李白水)·박제행(朴齊行)·김기진(金基鎭)·김복진(金復鎭)·연학년(延鶴年) 등 20여 명이 종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 식당에서 발단식을 가졌다. 이 단체는 당시 토월회(土月會) 지도부가 금전적 이익에만 관심을 갖고 신극운동에 제대로 동참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문예 를 연구하고 일반인에게 문예사상을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단되었다.

백조회는 충실한 신극을 공연하기 위하여 한 달에 한두 번씩 정기공연을 갖기로 하였다. 각 본부·출연부·무대장치부·음악부 등 4부로 구성한 이 극단에는 토월회의 핵심단원들이 포함되었다. 전무에 김을한(金乙漢)을 비롯해서 각 본부에 김기진(金基鎭)·연학년(延鶴年)·이성해(李星海)·김동환(金東煥) 등, 출연부에 이백수(李白水)·윤심덕(尹心悳)·박제행(朴齊行)·홍범기(洪範基)·이용구(李用求)·권영덕(權寧德)·차연호(車淵鎬)·이진원(李晉遠)·송기연(宋基演)·김세영(金世英), 무대장치부에 김복진(金復鎭)·안석영(安夕影)·이승만(李承萬), 음악부는 윤심덕·박철희(朴哲熙) 등이 배치되었다.

이상적 신극운동을 내걸고 화려하게 등장한 백조회는 발족 시 토월회를 능가하는 인적 구성을 갖추었지만, 단순히 토월회에 대한 반발로 조직된 극단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공연을 해보지도 못하고 해산되었다.

의의와 평가

백조회는 창단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해산되었지만, 극단 토월회를 와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백조회가 발족한 1926년 2월 24일 토월회는 결국 해산하였으며, 2년 뒤 재기공연도 긍정적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참고문헌

『한국 근·현대 연극 100년사』(한국 근·현대 연극100년사 편찬위원회, 집문당, 2009)
『우리연극 100년』(서연호·이상우, 현암사, 2000)
『한국연극반세기』(강계식, 현대교육출판부, 1986)
『한국연극사조연구』(장한기, 동국대학교 한국학연구총서 8, 아세아문화사, 1976)
『한국신극사연구』(이두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6)
『동아일보』(1926.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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