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회(白鳥會)는 토월회에서 탈퇴한 신극운동의 선구자들을 망라해 새로이 이상적 신극운동을 해보겠다는 뜻으로 조직되었다. 이를 위해 1926년 2월 24일에 이백수(李白水)·박제행(朴齊行)·김기진(金基鎭)·김복진(金復鎭)·연학년(延鶴年) 등 20여 명이 종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 식당에서 발단식을 가졌다. 이 단체는 당시 토월회(土月會) 지도부가 금전적 이익에만 관심을 갖고 신극운동에 제대로 동참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문예 를 연구하고 일반인에게 문예사상을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단되었다.
백조회는 충실한 신극을 공연하기 위하여 한 달에 한두 번씩 정기공연을 갖기로 하였다. 각 본부·출연부·무대장치부·음악부 등 4부로 구성한 이 극단에는 토월회의 핵심단원들이 포함되었다. 전무에 김을한(金乙漢)을 비롯해서 각 본부에 김기진(金基鎭)·연학년(延鶴年)·이성해(李星海)·김동환(金東煥) 등, 출연부에 이백수(李白水)·윤심덕(尹心悳)·박제행(朴齊行)·홍범기(洪範基)·이용구(李用求)·권영덕(權寧德)·차연호(車淵鎬)·이진원(李晉遠)·송기연(宋基演)·김세영(金世英), 무대장치부에 김복진(金復鎭)·안석영(安夕影)·이승만(李承萬), 음악부는 윤심덕·박철희(朴哲熙) 등이 배치되었다.
이상적 신극운동을 내걸고 화려하게 등장한 백조회는 발족 시 토월회를 능가하는 인적 구성을 갖추었지만, 단순히 토월회에 대한 반발로 조직된 극단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공연을 해보지도 못하고 해산되었다.
백조회는 창단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해산되었지만, 극단 토월회를 와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백조회가 발족한 1926년 2월 24일 토월회는 결국 해산하였으며, 2년 뒤 재기공연도 긍정적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