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가야의 하나인 성산가야(星山加耶) 또는 벽진가야(碧珍加耶)에 속하였는데, 신라가 정벌하여 본피현(本彼縣)으로 바꾸었다. 경덕왕 때 신안현(新安縣)으로 고쳐 성산군(星山郡)의 영현으로 하였다가 뒤에 벽진군으로 바꾸었으며, 고려 태조 때 경산부(京山府)로 고쳤다.
923년(경명왕 7) 벽진장군 양문(良文)이 고려에 항복해 와서 고려는 낙동강 동쪽의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였다. 926년(경애왕 3)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보낸 군사와 벽진군에서 일대격전이 벌어져 많은 전사자를 내면서 양문이 전사하고 후백제군이 경주로 쳐들어가는 발판을 만들었다.
벽진의 뜻은 ‘대읍(大邑)’으로 이곳은 하천 유역의 분지평야로 도시 발달에 알맞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