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서광세(徐光世) 외 수명이 한성에 세운 낙연의숙(洛淵義塾)이 후에 보광학교로 개명되었다. 1904년 9월 이준 등 4인의 유지들이 교육과 문화 활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한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는 사립국민사범학교를 설립하여 초등교원 양성교육을 실시하고, 한성에 보광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6년에는 한성에 한남학교(漢南學校)도 설치하였다.
보광학교는 1906년 9월에 야간과정을 폐지하고 대신 주간과정으로 고등보통과를 개설하여 중등교육기관으로 개편되어 근대적인 중등교육을 실시하였다.
보광학교는 수업기간을 3학기로 하고, 입학자격은 연령 18세 이상 35세 이하로 하였으며, 입학시험과목은 국한문의 독서와 작문으로 하였다.
보광학교의 학과목은 수신·국어·교육학·작문·법학·경제학·이과·일어·산술·지지(地誌)·역사·도화·체조 등이었다.
보광학교는 사범과도 개설하여 민족교육의 선봉에 나설 교사양성에 힘쓰기도 하였다.
이준의 보광학교는 이종호의 보성학교, 이동휘의 보창학교와 함께 근대 교육의 삼보(三寶)라고 일컬어진다.
이준은 1906년 유성준(兪星濬) 등과 국민교육회 활동에 가담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보광학교(普光學校)와 한남학교를 운영하며,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 지도하였다.
이준은 국민교육회가 모태인 보광학교 교장을 겸임하면서 노동청년과 상공청년의 계몽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준은 “교육은 국방”이라면서 “조국의 완전독립을 위해 남의 나라 청년보다 십 배의 정열을 내서 부지런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면서 ‘3천리에 3천개 학교 설립’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보광학교의 야학제도와 같은 학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