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앞면 1칸, 옆면 1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겹처마의 사모지붕이다. 희양산(曦陽山) 기슭에 자리잡은 봉암사는 879년(헌강왕 5)에 창건된 뒤, 935년(태조 18)에 다시 고쳐 지었는데, 임진왜란 등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자주 불탔지만, 극락전은 일주문과 함께 불타지 않았다고 전한다. 특히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피난하였을 때 원당(願堂)으로 사용하였기에, 현재에도 건물 안에 ‘어필각(御筆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은 법주사 팔상전(捌相殿)과 함께 현재 전하는 몇 안 되는 목탑(木塔)이다. 다소 높은 기단(基壇)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기단은 길고 네모난 널돌로 위아래에 덮개돌 모양을 구성하고 그 사이의 면석을 채운 모습이다. 기단 위에는 외진주(外陣柱) 12개와 내진주(內陣柱) 4개를 세워 결구(結構)하였다. 곧 윗덮개돌 위에는 건물 바깥쪽을 두른 기둥인 외진주가 3칸의 형식으로 놓여 1층을 이루고, 건물 안쪽에는 외진주보다 높이가 높은 기둥인 사천주(四天柱)를 받쳐 네모난 몸채를 만들었다. 건물 안의 바닥에는 ‘정(井)’자형의 우물마루를 깐 뒤 작지만 정교하게 장엄한 불단(佛壇)을 설치하였고, 기둥과 기둥 사이는 널벽[板璧]과 창호로 마감하였다.
공포(栱包)는 내외2출목(出目)의 다포(多包)로 구성하였는데, 기둥과 기둥 사이에 놓는 주간포(柱間包)는 4면의 각 면마다 2기씩 배치되었고, 심포는 모두 귓기둥의 귀포[隅包]로 처리되었다. 살미첨차는 바깥쪽은 짧지만치켜 올라간 모습이 힘이 넘치는 앙서[仰舌]형이고, 안쪽은 끝부분이 둥글게 깎인 교두(翹頭)형이다. 지붕은 각서까래[角椽] 홑처마로 이루어진 1층 지붕 위에 처마의 곡선이 늘씬한 겹처마의 2층 지붕을 모임지붕으로 만들었는데, 사모지붕의 가운데에는 상륜(相輪)을 두어서 탑의 요소를 두루 갖추게 하였다.
목탑 양식으로 건립된 이 건물은 기단 부분이 창건 당시의 것으로 보인다. 결구 수법 등이 독특하지만, 대체로 조선 중기의 수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