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빚어오다가 1979년에 한계에 이르렀다. ‘백두진(白斗鎭) 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으로 시작된 1979년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연행·체포·고문·연금 등 강압책이 잇따른 가운데서도 야당과 재야세력의 저항이 고조되어 유신 정국은 긴장을 더해 갔다. 대표적으로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오원춘사건(吳元春事件)’에 이어 ‘YH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이 일어났고, 잇따라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박탈로 정국은 갈등으로 치달았다.
더불어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위기와 결합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는 한국경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고 갔고, 결국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과 함께 1979년 4월 긴축 등을 골자로 한 ‘경제안정화정책’을 정부는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게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와 같은 안정화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더욱 부채질하여 기업의 부도율이 사상 최고치로 치솟고 가뜩이나 어려운 도시하층민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됐던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이런 사회경제적인 모순과 연관되어 있었다. 1979년 당시 부산의 산업별 생산구조는 광공업 비중이 42.1%인데 비해 전국의 경우 23.7%로 광공업취업구성비가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부산은 신발, 의류, 합판 등 영세한 자본과 낮은 수준의 기술이 결합한 저부가가치 제조업이 주를 이뤘으며, 1966년 부산 내 제조업 종사자의 비율은 73.3%, 1975년에는 77.3%, 1980년에는 73.5%로 커다란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1979년에 들어서 부산지역 경제상황은 극도로 악화됐다. 부산지역 부도율은 전국의 2.4배, 서울에 3배에 달했고, 수출증가율 역시 전국증가율인 18.4%에 훨씬 못 미치는 10.2%로 하락했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은 이런 정치, 사회경제적 모순이 모여 일어난 학생·시민들의 반정부 민중항쟁이었다.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경,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학생들은「애국가」·「선구자」·「통일의 노래」등을 부르는 한편,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민주선언문」이란 이름의 유인물은 학원의 민주화, 언론자유, 인권보장에의 신념을 확인하고,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집권층의 퇴진만이 5천 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고 선언하였다.
구호와 노래, 선언문 낭독 등으로 기세를 올린 학생들은 산발적으로 교문을 나가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이때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학생들은 광복동과 남포동 등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애국가」등을 부르는 한편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이를 막으려는 경찰과 곳곳에서 충돌하였다. 한편, 비슷한 시간에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시내에 진출,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데모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경찰관과 학생 100여 명이 다쳤다. 이튿날 17일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격화되었다. 주목되는 점은 이날부터의 데모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한 사실이었다. 오후까지 시위는 학생들에 의해 주도됐으나 야간시위에서 시위대는 3분만에서 5만에 이르렀고 시위대에는 화이트 컬러, 노동자, 상인, 업소 종업원, 고교생들도 동참했다. 17일에 이르러서는 도시룸펜, 접객업소 노동자, 영세상인, 반실업상태 자유노동자, 무직자들이 시위를 주도했다. 부산시경의「79부마사태의 분석」이란 문건을 보면 데모의 특이양상으로 “20세 전후 불량성향자 대학생 가장 합세(때미리, 식당종업원, 공원, 구두닦이 등), 시민들 박수/음료수 공급 등 데모학생 동조 고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학생 시위는 이미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가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학생·시민들은 KBS부산방송국과 도청·세무서·파출소 등을 파괴하였고, 일부 경찰차량과 보도기관의 취재차량도 피해를 입었다.
한편, 민주화운동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됐다. 해질 무렵 1,000여 명의 경남대학 학생들이 마산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 일부시민들이 가담한 가운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어두워진 다음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공화당사·방송국·신문사에 투석,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수십 명의 청년들은 공화당사의 셔터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서류와 집기를 밖으로 내던졌고, 파출소로 뛰어 들어간 또 다른 청년들은 벽에 걸려 있던 박정희의 사진을 파손했다.
19일에는 더욱 치열해져 마산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날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산업전문대학, 그리고 일부 고교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다. 주목할 사실은 공장직공·점원·날품팔이 등으로 보이는 10대 내지 20대의 젊은이들이 가담하여 시위의 앞장에 선 점이었다. 이들의 행동은 격렬하여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 이처럼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사실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 ‘부유층’에 대한 시위대의 공공연한 공격, 세 번째로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부가세를 없애라”,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외침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문사·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다.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나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18일 0시를 기해 포고문 제1호를 발표, 각 대학의 당분간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의 2시간 연장 등 8개항을 포고하였다. 계엄사령부는 10월 24일 군·검합동반을 편성, 계엄시기 중 조직깡패를 발본키로 특별수사부를 설치, 소탕작전에 들어가 132명을 검거하고 23명을 구속 처리하였다.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2일 뒤인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정부는 경상남도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였다. 이와 함께 마산 지역 작전사령부는 마산일원에 군을 진주시켜 시청 등 정부기관과 언론기관 등 공공건물에 대한 경계에 들어갔다. 통행금지가 2시간 연장되었고, 경남대학과 경남산업전문대학은 무기한 휴교조처가 취해졌다. 계엄령이 선포된 부산 지역에는 공수부대가 동원되어 시위하는 시민과 학생에 대해 강도 높은 진압이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계엄령과 위수령 발동 후 부마민주항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단시간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 직후 1주일도 안 되어 10·26사건이 발발하였고, 유신체제도 종언을 맞이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쌓였던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고,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부마민주항쟁을 둘러싸고 민주화 운동의 성격, 지도세력 등 여러 평가들이 있으나 YH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 사건과 함께 유신체제를 아래로부터 붕괴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제11851호, 2013.6.4. 제정)과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시행령’(대통령령 제24901호, 2013. 12. 4. 제정)에 따라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