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신은 1895년 3월에 설립된 개성학교(開城學校)이다. 당시 부산 경무관(警務官)이었던 박기종(朴琪淙)은 수신사(修信使)의 역관(譯官)으로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뒤, 부산에도 근대식 교육기관의 설립이 절실함을 깨닫고 1895년 5월에 학교의 창립을 결의하였다.
이에 박기종과 이내옥(李乃玉)·배문화(裵文華)·변한경(邊翰敬)·이명서(李命瑞) 등 5명이 공동 출자하여 부산의 영주동에 부지 1,000여평을 구입, 이듬해 1월에 6동의 교사를 준공하였다. 같은 해 3월에 개교하여 3년제 초등과와 4년제 중등과를 설치, 100여 명의 학생이 입학하였다.
1899년 3월에는 구관서당(舊館書堂)과 부산서당(釜山書堂)을 지교(支校)로 정하여 구관지교와 부산진지교를 설치, 양교생 150명을 수용하였다. 1900년에 보조교(補助校)로 밀양에 개창학교(開昌學校), 동래에 개양학교(開楊學校), 마산에 개진학교(開進學校)를 설립하고, 1903년 6월 마산의 개진학교에 수공과(手工科) 및 농사시험장을 설치하였다.
1907년 3월에는 관립학교로 내정되었으나 사립학교로 존속할 것을 희망, 교명을 사립부산개성일어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09년 4월에 다시 공립학교로 개편되어 교명을 공립부산일어학교로 개칭하고 초등과는 공립부산보통학교로 개칭하였다.
이에 따라 사립학교로서의 보조금 지급폐지 통첩을 받고 각 지교 및 보조교를 폐지하게 되어 부산진지교는 뒤에 부산진보통학교로 발족되고, 개양학교는 뒤에 동명학교(東明學校)에 인계되었다. 같은 해 6월에 실업학교로 정식 수업을 개시하면서 이 날을 개교기념일로 정하였으며, 1911년 11월에 교명을 부산공립상업학교로 개칭하였다.
1922년 4월에는 일제에 의해 교명이 부산진공립상업학교로 변경되었는데, 이에 대한 재학생의 동맹휴교 및 졸업생 등의 항의로 이듬해 4월에 다시 부산제2공립상업학교로 개칭하고 수업연한을 3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였다. 이와 함께 학교의 규모도 10학급 500명으로 확장되었으며, 교사를 동래부 서면 부전리의 신축교사로 이전하였다.
한편, 1940년 11월에는 부산지역 체육대회에서 일본심판장 노다이(乃台)의 한국인학교에 대한 편파적 판정에 격분, 동래중학교와 함께 운동장을 뛰쳐나가 부산역 광장에 집합한 뒤, 노다이의 관사를 습격하였다.
이 사건은 민족차별에 대한 학생들의 민족자존심을 나타낸 것으로, 부산학생항쟁 또는 노다이사건이라 하여 우리 나라의 근대사에 기록되어 있다.
광복과 함께 교명을 부산공립상업학교로 환원하고, 광복 후 초대 교장에 정인목(鄭寅穆)이 취임하였다. 1946년 9월에 수업연한 6년의 부산공립상업학교로 개편되었다. 1950년 5월 학제 개편에 따라 중학교와 분리, 부산상업고등학교로 개편되어 1955년에 부산진구 부전동으로 이전하였다.
1984년 3월에는 회계과·무역과·정보과·상업과 등으로 편성하였으며, 1989년 5월에 현재의 위치로 신축·이전하였다.
1995년 6월 100주년 기념탑을 건립하고 부상 100년사를 발간하였다. 2004년 6월 일반계고교로 체제 전환의 승인을 얻어 동년 11월개성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08년 3월 현재 24학급 947명이 재학, 교원은 73명이며, 졸업생은 95회 총 2만 9,946명을 배출하였다.
‘바른 품성과 창의성을 갖춘 개성인 육성’이라는 교육목표 아래 나눔 체험활동을 통한 바른 인성 함양, 수요자 중심의 맞춤형 학력향상 프로젝트 운영, 개성인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교육력을 모으고 있다.
특색사업으로는 ‘생활지도 상·벌점제를 통한 자율과 책임의 기본생활습관 갖추기’를 시행하고 있다.
1920∼1930년대에는 축구·야구·마라톤·유도·연식정구 등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했으며, 특히 축구는 1960년대 이후 전국고교축구대회 및 대한축구회장배쟁탈 전국축구대회 등에서 다수 우승하였고, 1983년에 각종 대회에서 4관왕이 된 적도 있다.
야구에서도 봉황대기 및 황금사자기 야구대회 등 고교야구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일본의 시모노세키상업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으며, 1995년에는 『부상100년사』를 간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