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군은 금정봉(金井峰)에서 상학봉(上鶴峰)으로 연결되는 부산지역의 서부산지에서 서쪽으로 뻗는 능선부 말단에 형성된 해발 45m 내외의 구릉상에 위치한다. 고분들이 분포하는 구릉의 서쪽 500m 앞에는 낙동강이 인접하여 흐르고 그 연안에는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또 고분군의 전면 좌우에는 해발 50m 정도의 독립 돌출된 구릉이 자리잡아 그 사이에 ‘ㄷ’자상의 평지를 두고 있어 취락이 형성될 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 고분군이 위치한 곳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김해평야와 마주보고 있어 지리적으로 요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원래는 상당히 많은 고분들이 분포하였으나 이 가운데 7기의 고분만이 1972년 부산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발굴되었고, 지금은 도시개발로 모두 없어졌다.
발굴조사된 고분들은 발굴 당시 봉토가 남아 있지 않았고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으며, 모두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으로 보고되어 있다. 돌덧널은 길이, 너비가 2.0×1.0m 미만의 소형과 3.0×1.0m 이상의 중형급으로 나눌 수 있는데, 평면형태는 모두 장방형(長方形)이다. 돌덧널의 벽은 대부분 깬돌[割石]을 눕혀쌓았으나, 1기(1호분)의 한쪽 단벽은 아래에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눕혀쌓기를 하여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소형의 경우 바닥은 잔돌을 깔거나 생토를 그대로 이용하였고, 중형의 경우 바닥 중앙에 장방형의 주검받침[屍床]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소형은 돌뚜껑을 하였으나 중형에서는 돌뚜껑이 발견되지 않았다. 중형의 측벽과 주검받침 위에는 진흙을 바르고 깔아 다졌다. 돌덧널의 장축은 대부분 동∼서 방향이지만 6호분은 남∼북 방향이었다. 유물은 대부분 도굴되어 그 매납 원상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경우 양 단벽측과 중앙부에 토기 등을 부장하였는데 중앙부의 토기로 보아 중형의 경우 나무덧널[木槨]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출토유물은 발굴된 것과 채집된 것을 합하여 토기 53점, 철기 27점, 청동제화살통장식(靑銅製盛矢具金具) 1점 등 총 82점이다. 토기는 대부분 도질토기로서 외절구연굽다리접시, 그릇받침, 바리모양그릇받침, 화로모양토기, 항아리, 입큰잔 등이다. 이 토기들은 부산·김해지역 4세기대 토기의 전형(典型)을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 김해와 부산간의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철기로는 투겁창·화살촉·도끼·손칼·추(錐)·낫 등이 있다. 3호분 출토의 청동제화살통부속구는 이 고분들에 원래 비교적 화려한 부장품들이 매납되었으나 모두 도굴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조사된 고분들과 주변에서 채집되는 토기들은 고식도질토기 단계에서 가야토기가 발생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신라·가야토기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이러한 유물들이 모두 4세기대로 편년되고 있어 이 곳의 구덩식돌덧널들은 낙동강하류역에 구덩식돌덧널이 채용되는 시기를 판단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유적 전체가 조사되지 않은 상태에서 없어졌기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지만 발굴된 고분들만으로 볼 때 이 곳의 고분축조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이 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은 낙동강을 통한 물자의 교류에서 이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래지역의 중심고분군인 복천동(福泉洞) 고분군을 정점으로 한 세력집단의 하위집단으로서 대외 문화교류의 창구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