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바탕에 수묵으로 그렸고, 크기는 세로 54.9㎝, 가로 30.6㎝이다. 고(故) 손창근 씨 유족이 소장하고 있으며, 김정희의 묵란도(墨蘭圖)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으로,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라고도 불린다.
이 그림에 붙여진 ‘부작란도(不作蘭圖)’ 혹은 ‘불이선란도’라는 제목은 화면의 왼쪽 윗부분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줄을 바꾸며 써내려 간 쓴 김정희의 제시(題詩)에서 연유한다.
“난초 꽃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만에 뜻하지 않게 깊은 마음속의 하늘을 그려 냈다. 문을 닫고 마음 깊은 곳을 찾아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힐(維摩詰)의 불이선(不二禪)이다.”라 썼다. 또 조금 작은 글씨로 “만일에 누가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역시 또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살던 유마힐의 무언(無言)으로 거절하겠다.”라는 글이 추사체(秋史體)로 적혀 있다.
이 시와 글은 석가모니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인도의 현인(賢人) 유마힐과 보살들 간의 대화를 기록한 『유마힐경(維摩詰經)』 중 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에서 따온 것이다. 즉 선(禪)을 여러 가지 말로 설명하는 보살에게 오직 침묵으로 대항하여 ‘둘이 될 수 없는 선(不二禪)’의 참뜻을 보여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김정희는 오랜만에 그린 난초를 ‘성중천(性中天)’이라 하고 이를 다시 ‘불이선’에 비유하고 있다. 또 한 번 크게 꺾인 길다란 난초 잎의 오른쪽에는 “초서(草書)와 예서(隷書)의 이상한 글씨체로 (난을)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를 이해하고 어찌 이를 좋아할 수 있으랴.”라고 썼다. 김정희 자신이 그의 화란법(畵蘭法)에서 늘 주장해 온 것처럼 예서와 초서로 난을 그렸다고 밝힌 것이다. 과연 이 그림의 난초는 언뜻 보면 잘 그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추사체의 글씨를 특징짓는 기괴(奇怪)라는 표현이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이 밖에도 화면의 제일 왼쪽에는 “처음에는 달준(達俊)을 위하여 거침없이 붓을 놀렸다. 단지 하나는 있을 수 있으나 둘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오소산(吳小山)이 보고는 빼앗듯이 가져가니 우습다.”라고 쓰여 있다.
이 글을 통하여 김정희는 사람들에게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림을 그려 주고, 그 친구들은 그의 깊은 마음속의 표현인 난초 그림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특별한 지기(知己) 사이나 작화(作畵) 태도는 북송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중국 사대부 화가들의 전형적인 이상세계를 상기시켜 준다.
난초는 담묵(淡墨)으로 힘없이 그려져 이제 곧 시들어 버릴 듯하다. 더구나 여백을 꽉 채운 짙은 먹 글씨들의 위세에 눌려 초라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연약하면서도 군데군데 보이는 비백(飛白)의 묘미와 몇 번씩 구부러진 획의 강인성이 두드러져 보이며 한 송이 꽃이 향기를 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