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전하지 않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편년체(編年體)로 된 고려의 통사(通史)로 추정된다.
정총(鄭摠)이 쓴 「고려국사서(高麗國史序)」에 “퇴임한 시중(侍中) 이제현(李齊賢)이 『사략(史略)』을 지었으나 숙왕(肅王)에 그쳤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제15대 숙종(肅宗) 때까지의 역사를 기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20년 3월조에도 “고려의 이제현이 국사(國史)를 편찬하고 『사략(史略)』이라고 이름 붙여,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과 흥하고 쇠퇴하는 대개(大槪)를 약술했으니, 당시의 귀감을 삼고자 함이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한편,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태조(太祖)에서 숙종까지를 다룬 이제현의 논찬(論讚)이 남아 있는데, 그의 『사략(史略)』을 자료로 이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이제현이 국사가 갖추어져 있지 않음을 걱정해 백문보(白文寶) · 이달충(李達衷)과 함께 기년(紀年) · 전(傳) · 지(志)를 지었다. 이제현은 태조에서 숙종까지, 백문보와 이달충은 이후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백문보는 겨우 예종(睿宗) · 인종(仁宗) 두 조(朝)를 초했고, 이달충은 아직 마치지 못했던 것을 남천(南遷 : 홍건적의 침입으로 인해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한 일) 때 모두 잃어버렸다. 이로써 다만 이제현의 태조기년(太祖紀年)만 남았다.”
그러나 「익재선생연보(益齋先生年譜)」에 따르면 “지정(至正) 17년(1357)에 이제현이 기년 · 전 · 지를 편찬했으나, 그 뒤 홍건적(紅巾賊)의 난으로 없어지고 다만 태조에서부터 숙종 대까지의 기년만 남았다.”고 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사략(史略)』과 여기 보이는 기년 · 전 · 지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아마 동일한 책을 후대에 다르게 기록한 듯하다.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태조에서 숙종에 이르는 이제현의 논찬을 이용한 것을 보면, 『사략(史略)』에 논찬들이 실렸던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