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사야부곡(沙也部曲)이었는데, 조선 초기에 사야촌(沙也村)이 된 것 같다. 사야(沙也)의 지명 유래는 ‘사(沙)’가 모래나 자갈을 뜻하고, ‘야(也)’가 접미사(接尾辭)나 들〔野〕의 뜻이 있으므로 ‘모래가 있는 해안지형’을 의미한다.
사야부곡의 기능을 추정하기는 어려우나 지형상의 특색으로 보아 주민들이 어염(魚鹽)에 종사했던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에는 사야촌이 부근의 기포(碁浦)나 두모포(豆毛浦)와 함께 해안을 방어하는 군사기지와 수륙(水陸)의 물산을 수송하는 포구로서의 구실을 했다.
사야촌 북쪽에는 고읍(古邑)의 산성이 있었고, 두모포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주둔했었다. 남쪽에는 남산(南山) 봉수가 있었고, 신명역(新明驛)을 거쳐 양산(梁山)과 연결되는 도로가 있었다. 기장을 통해 동해안의 서생포(西生浦)나 동래(東萊)로 육로가 발달하였다. 신라 때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으며, 임진왜란 때는 이곳에 왜인들이 왜성(倭城)을 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