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심덕은 1923년 동경음악학교를 관비생으로 졸업하고 돌아와 음악활동과 교편생활을 하였다. 1926년 극단 토월회(土月會) 회원으로 신극운동에 참여하였다.
1926년 7월에 연극관계로 알게 된 이기세(李基世)의 주선으로 당시 유행하던 번안가요 「매기의 추억」·「어여쁜 새악시」 등 10곡의 노래를 취입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갔다. 8월 1일 취입 예정에 없었던 이바노비치 작곡인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를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로 취입하였다. 가사는 윤심덕이 썼다. 가사의 1절은 다음과 같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가느냐
8월 3일 윤심덕은 애인인 극작가 김우진(金祐鎭)과 함께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 시모노세키-부산을 오고간 여객선)을 타고 귀국 도중 김수산(金水山)·윤수선(尹水仙)이라는 가명으로 유서를 남기고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 즉, 유부남과의 사랑을 정사(情死)로 끝을 맺었다. 다분히 염세적인 윤심덕의 노래 「사의 찬미」는 이들의 정사사건과 더불어 많은 음반이 팔려 음반판매의 촉진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