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상에는 수원부의 남쪽 5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 수원에는 7개의 부곡(部曲)과 3개의 향(鄕), 8개의 처, 3개의 장(莊)이 있었다. 19세기 말 그 중 8개가 없어졌으나 사정처는 그대로 남았다.
사정처의 위치를 팔탄면으로 보는 것은 조선시대 팔탄면이 수원부 남쪽 50리에 있고, 부근에 사창(四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능은 확실하지 않으나 남양만의 해안지역에 있고, 주변에 남양(南陽)·양성(陽城) 등의 비월지(飛越地)가 있으며, 이들 현의 해창(海倉)이 밀집하여 있던 점으로 보아 조운(漕運)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남양만의 넓은 해안평야에 자리잡고 있어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수원에서 남양만을 남북으로 잇는 도로가 발달하였으며, 남양과 진위(振威)를 연결하는 도로가 있었다. 북쪽에 건달산(建達山) 봉수가 있었고, 해안지방에는 흥천산(興天山)·괴태곶(槐台串) 봉수가 있었다. 이곳은 고려 말기 이후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였던 곳이며, 조선 말기는 아산만과 함께 조운이 성하였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