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하삼도(下三道)라고도 한다. 삼남지방은 지역적으로 호강(湖江: 지금의 금강) 이남의 호남지방, 제천 의림지(義林池) 서쪽의 호서지방, 조령(鳥嶺) 남쪽의 영남지방으로 세분된다.
삼남이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세종 때부터 하삼도에 대한 논의가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지방행정구역이 체계를 잡은 조선 초기 태종 때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삼남지방을 동북면(東北面)이나 서북면(西北面)과 같이 하나의 지역 단위로 보는 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방위상의 개념에서 나왔다.
조선시대 삼남지방은 농업ㆍ조운(漕運)ㆍ군사적인 의미에서 중요성을 가졌다. 삼남지방에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조정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자주 논의하였던 기록이 많이 나온다.
17세기 후반의 조운에 있어서 삼남지방이 전국의 87%를 차지하였는데, 마산창(馬山倉)ㆍ법성창(法聖倉)ㆍ공진창(貢進倉) 등 이름 있는 해창(海倉)을 통하여 이들 세곡을 운반하였으므로 세곡 운반에 대한 규정이 엄하였다. 대원군 때 양요(洋擾)로 인하여 한강의 뱃길이 막혔을 때 서울에서 쌀값 폭동과 주민들의 미전(米廛) 습격 사건이 일어난 예로 미루어, 삼남지방이 차지하는 조운의 비중을 알 수 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삼남지방은 일찍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아, 특히 수군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 방비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후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을 설치하여 지휘 계통을 원활히 하였으며, 고종 때는 삼도육군통제사영이 설치되었으나 뒤에 폐쇄되었다.
고려 말기 왜구의 준동을 제압한 뒤 조선 초기에는 북방 개척에 힘썼으나, 임진왜란 후에는 삼남지방에 대한 국방을 강화하였다. 이는 봉수망(烽燧網) 설치에 있어 조선 초기 북쪽의 국경 지대에 설치하였던 봉수대의 수가 17세기 이후 감소된 반면 삼남지방에는 늘어났다는 것과, 17세기 이후 삼남지방의 수군만호(水軍萬戶)나 독진(獨鎭)의 수가 늘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