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부산진(釜山鎭)에 해당하는 동래의 부산포(釜山浦, 또는 富山浦),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해당하는 웅천(熊川)의 제포(薺浦, 또는 乃而浦), 지금의 경상남도 방어진과 장생포 사이에 해당하는 울산(蔚山)의 염포(鹽浦)를 말한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던 곳이다. 이들 지역은 예로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라 군사적으로 중요시하였던 곳이었다.
부산포진(釜山浦鎭)은 동래현의 남쪽 20리 지점에 있었으며, 1488년(성종 19)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5,356척에 이르렀고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다스렸다.
웅천의 제포진(薺浦鎭)은 웅천현 남쪽 5리 지점에 있었으며, 성 주위가 4,000여 척에 이르렀는데 수군첨사(水軍僉使)가 다스렸고 수군만호(水軍萬戶)가 1인 있었다.
울산의 염포진(鹽浦鎭)은 울산군 남쪽 23리 지점에 있었으며, 성 주위가 1,000여 척이나 되었다. 본래 수군만호가 다스렸는데 삼포왜란 이후 진을 폐지한 것 같다.
부산포에는 한때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가 지휘하던 좌병영(左兵營)이 있었고, 염포에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가 지휘하던 좌병영이 있어 울산의 외곽을 지키는 군사요지였다.
삼포의 해안 지역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던 곳이었다. 조선 초기부터 이들을 다스려 세종 때는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여 왜구가 발호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뒤 일본이 무역을 재개해줄 것을 간청하므로 1423년(세종 5) 부산포와 제포(내이포)를 개항하여 왜인들의 거주를 허락하였다. 뒤에 이 지역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수가 증가하여 이를 분산시키기 위하여 1426년(세종 8) 염포를 개항하였다.
왜인들은 성 밖에 거주하도록 제한된 장소를 왜관(倭館)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들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우리나라 관원들과의 마찰이 잦았다. 1510년 왜인들이 부산포와 제포를 습격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 난이 평정된 뒤 삼포의 왜관이 폐쇄되었으나 뒤에 부산포와 제포를 다시 개항하였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표시된 초량왜관(草梁倭館)은 조선 말기까지 이들의 거류지가 존속하였음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