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래 학교 교과서에서 ‘고금상정예문’이라 했으나, 이것은 고금의 예의 자료를 두루 수집해 엮은 데서 붙여진 서명이고, 정식 서명은 『상정예문』이다.
고려 인종 당시 최윤의 등 17명의 학자들이 왕명에 따라 1147~1162년까지 공포된 법령·규범들을 수집, 고증하여 50권으로 편찬한 예서(禮書)로서, 『고금상정예문』이라고도 하는데, 현존하지 않는다.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의 해설에 의하면, 역대조종(歷代祖宗)의 헌장(憲章)을 모으고, 우리의 고금예의와 당나라의 예의를 참작해 위로는 왕실의 면복(冕服)·여로(輿輅)·노부(鹵簿) 등의 의례와, 아래로는 백관(百官)의 장복(章服)에 이르기까지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규보(李奎報)가 진양공(晋陽公)에 책봉된 최이(崔怡)[초명은 최우(崔瑀)]를 대신해 지은 「신인상정예문발미(新印詳定禮文跋尾)」를 보면, 최윤의 등이 엮은 『상정예문』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사이에 책장이 탈락되고 글자가 이지러져 내용을 참고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최이의 선친 최충헌(崔忠獻)이 보완하게 하여 2부를 작성한 다음, 1부는 예관에 주고 다른 1부를 자기 집에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몽골군의 침입으로 도읍을 강화로 옮길 때 예관은 황급한 나머지 미처 가지고 나오지 못하고 최충헌 소장본만 남게 되었다. 이를 다행으로 여기고 주자(鑄字)로 28부를 찍어 여러 관사(官司)에 나누어 간직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글에는 그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으나, 그 대작(代作)을 명한 최이가 진양후에 책봉된 것이 1234년(고종 21)이고, 대작한 이규보는 1241년에 죽었으므로 그 사이에 찍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천도 이후는 전란 중이라 그 난을 수습하는 일로 새로운 기술의 창안 같은 것에는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그와 같이 활자를 주조해 기술적으로 어려운 활자판 짜기를 고안하고, 또 쇠붙이에 묻기 어려운 먹물을 능히 개발해 책을 찍어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천도 이전에 이미 주자인쇄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을 능히 알 수 있게 한다. 이는 천도 이전에 주자로 찍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가 천도 이후 동요된 민심의 수습에 필요하여 1239년에 번각하고 다량으로 유통시켰는데, 그 책이 오늘에 전래되어 천도이전의 주자인쇄 사실을 여실히 뒷받침해 준다.
『상정예문』의 주자신인(鑄字新印) 기록은 고려 주자인쇄의 일면을 살피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