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초의 지명은 『삼국사기』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미상지분(未詳地分)으로 나온다. 632년(무왕 33) 여름 왕이 생초원(生草原)에서 사냥을 하였다는 기록과 659년(의자왕 19) 8월 생초진에 여자 시체가 떠올랐는데 18척이나 되었다는 두 개의 기록으로 보아 금강하류의 지명으로 보인다. 이는 왕이 사냥을 나갈 수 있는 들[原]과 18척의 여자 시체가 떠오를 만한 나루터라면 부여 부근에서 금강 외에는 해당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지명의 특성으로 보아 풀이 우거지고 낮은 언덕들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므로, 전라도와 접경이 되는 황등(黃登: 지금의 논산) 지방의 준평원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