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조의 말미에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 이래 아직 문자로 사실을 기록함이 없더니, 이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서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고흥은 일찍이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여, 백제의 역사 편찬에 관한 구절이 보이고 있다. 여기서 서기를 역사서 이름이 아닌 보통명사로, 즉 공식적인 문자기록이 제도화되기 시작하였다는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근초고왕 때와 결부되어 전해지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백제는 오랫동안 낙랑군(樂浪郡)·대방군(帶方郡)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한인들을 많이 흡수할 기회가 주어져 있었으며, 바로 그들의 영향으로 한문이 보급된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일로 짐작된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아직 문자로 사실을 기록함이 없었다.”는 기사는 『서기』라는 국사의 편찬이 아직 없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정복국가로 대두한 근초고왕 때는 『국사(國史)』가 편찬된 신라의 진흥왕 때와 견주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서기(書記)』는 단순한 문자의 기록이 아닌 역사서로 규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백제가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고 대외적인 발전을 시작할 무렵에 편찬한 이 책은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건설의 문화적 기념탑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