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5판. 92면. 작자의 제2시집으로 1954년 영웅출판사(英雄出版社)에서 간행하였다. 전체를 4부로 나누어 1부에 「목숨」·「비(碑)」 등 8편, 2부에 「낙엽(落葉)」·「멋」 등 6편, 3부에 「기폭과 날개」 등 2편, 4부에 「보이지 않는 도표」·「시간의 언덕」 등 6편, 모두 22편을 수록하고 있다.
지은이는 책 끝의 후기에서 제3부의 「기폭과 날개」·「눈」의 2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1951년에서 1954년까지의 작품을 엮은 것이라고 밝히고, “시 행위가 단순히 시인의 도락적(道樂的) 흥사(興事)로 그치고 말거나, 또는 현대의 자각을 상실한 매카니즘적인 언어의 유사(遊事)로 전락되고 만다면 우리는 시 행위의 올바른 모럴을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시집에서는 주로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죽음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끊임없이 의식하는 과정 속에서 삶을 확인하고 죽음의 끝없는 의미를 반추해나가는 시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목숨은 때묻었나/절반은 흙이 된 빛깔/황폐(荒廢)한 얼굴에 표정(表情)이 없다//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너랑 살아보고 싶더라/살아서 주검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싶더라//억만(億萬) 광년(光年)의 현암(玄暗)을 거쳐/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한 개의 별빛//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追憶) 속에서/없어진 이름을 부르고 있다./따뜻이 체온(體溫)에 젖어든 이름들”(「목숨」).
이 작품에서는 전쟁의 허망함 속에서 시인에게 첨예하게 다가온 ‘죽음’의 문제를,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치환하고 있다. 또한 「악수(握手)」라는 작품에서는 ‘많은 사람이 여러 모양으로 죽어갔고’, ‘죽지 않은 사람은 여러 모양으로 살아’와 ‘서로들 말 못할 악수를 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은 삶에 대한 허무의식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허무의 감정에 안주하기보다는 그러한 삶의 체험을 통하여 생명의 신비성과 존재론적 추구를 보여주는 극복의 양상을 띠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생과 사의 관념적 파악을 극복하는 단계로 나아가, 다음 시집 『제이(第二)의 서시(序詩)』(1958)에서는 좀 더 심화된 형태로 표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