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고구려의동음홀(冬音忽, 또는 冬三忽)이었는데, 신라 때해고군(海皐郡)으로 하였고, 고려 태조 때염주(鹽州)로 고쳤다. 고려 현종 때 군을 폐하여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속하게 하였고, 1217년(고종 4) 이 고을 사람이 거란병을 물리친 공로가 있다 하여 영응현령(永膺縣令)으로 승격시키고 감무를 두었다.
원종 때 이곳 사람 이분희(李汾禧)가 위사공(衛社功)을 세웠다 하여 석주로 승격시켰다. 1308년(충렬왕 34) 다시 온주목(溫州牧)으로 승격시켰으나 충선왕 때연안부(延安府)로 강등시켰고 조선 태종 때연안도호부로 하였다.
이 지역은 고려시대에 개성 서쪽에 위치하여 해주를 연결하는 길목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옥한 연안평야의 물산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였다. 동음홀이 ‘큰 고을’이란 뜻을 갖는 것과 같이 이곳은 일찍부터 큰 취락이 발달했었다.
고려시대에는 개성 서쪽을 방어하는 군사기지의 성격을 갖기도 하였는데, 해안지방은 북부의 봉수가 전달되는 통로였으며, 진산이던 봉세산(鳳勢山)에는 산성이 있었다. 지금의 연안면 지역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