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0년에 편찬된 『평양지(平壤志)』에 평양교방에서 공연한 선유락이 발도가(發棹歌)로 기록된 이래, 선유락은 다양한 명칭으로 기재되었다. 강원도 원주와 경상도 진주에서는 선락(船樂)으로, 전라도 무주에서는 선유락으로, 평안도 평양·삼화·성천·정주에서는 발도가(發棹歌)로, 평안도 영변에서는 이선곡(離船曲)으로 불렸다. 궁중에서 선유락이 처음으로 공연된 시기는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경축하여 화성 봉수당(奉壽堂)에서 열린 진찬(進饌) 때였다. 이후 궁중 연향에서 매우 인기 있는 종목이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전하는 선유락 기록은 다음과 같다. “채선을 설치하고, 여러 기녀들이 나누어 서서 배 떠나는(行船) 모습을 한다. 닻줄을 끌면서, 배를 둘러서서 춤춘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신라시대 가무백희 중 사선악부(四仙樂府)에 용(龍)·봉(鳳)·마(馬)·거(車)·선(船)이 있었는데, ‘선’이 선유락의 기원과 관련되었다고 한다. 또한 최영년의 『해동죽지(海東竹枝)』 속악유희(俗樂遊戱)에 따르면, 사신이 뱃길로 사행을 떠날 때 바닷가에서 전송하는 모습을 여러 기생들이 연출하여 선유락이라는 놀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연암집(燕巖集)』 권21 막북행정록(莫北行程錄)에는 박지원이 본 선유락의 춤절차가 소개되었고, 진주교방의 선락은 『교방가요(敎坊歌謠)』에 그 내용이 자세히 전한다. 궁중에서 공연되었던 선유락은 국립국악원에 소장된 무도홀기(舞圖笏記) 1건과 장서각에 소장된 8건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는데, 모두 고종대의 기록이다. 여령뿐만 아니라, 무동이 공연한 선유락 홀기도 2건 전한다.
선유락은 군례(軍禮)의 형식을 띠며, 정재로서는 가장 거대한 규모의 군무이다. 채색된 배가 무대 중앙에 있고, 동기(童妓) 2인이 배에 올라 돛의 앞뒤에 나누어 선다. 집사기(執事妓) 2인은 새깃을 꽂은 주립(朱笠)을 쓰고, 무관 관복인 철릭(天翼)을 입고, 검·활·화살을 차고, 배 앞에 양편으로 서서 호령집사의 역할을 한다.
채선(彩船)을 둘러싸고 두 겹의 원형으로 구성되는데, 안에서 배를 끄는 내무(內舞)와 바깥에 큰 원형으로 서는 외무(外舞)의 형태이다. 내무와 외무의 인원은 연향에 따라 차이가 있다. 예컨대, 외무의 경우 1868년의 진작에서는 20명이었는데, 1892년 진찬에서는 37명이 되어, 대한제국기인 1901년의 진연 때인 34명보다도 오히려 인원이 많았다.
선유락의 진행 중간에 부르는 창사는 어부사(漁父詞)로, “귀밑머리 하얀 늙은 어부 개펄 사이에 살면서 ‘물에서 사는 것이 산에서 사는 것보다 낫다’고 스스로 말하네 배 띄워라 배 띄워라”라고 시작되는데, 창사는 연향에 따라 생략되기도 했다.
선유락의 반주음악은 취타(吹打)이며, 악기는 징·북·호적·자바라·나발로 편성되고, 이를 연주하는 악사를 내취수(內吹手)라고 한다.
국립국악원에서 재현하여 1984년 대한민국무용제 전야제에 공연하였다.
지방 교방의 춤이었다가 정조대에 궁중으로 유입되어 발달된 지역예술이 궁중예술로 흡수되는 문화적 특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