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임(重任), 호는 석전(石田)·삼일당(三一堂)·잠암(潛巖). 양주 출신. 아버지는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성영국(成永國)이며, 어머니는 전주 최씨로 제용감부봉사(濟用監副奉事) 최언청(崔彦淸)의 딸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이다.
1570년 (선조 3)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뒤에 사옹원(司饔院)과 제릉(齊陵)의 참봉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스승 정철의 잦은 유배를 본 그는 벼슬을 싫어하였고, 또 동문인 권필(權韠)의 죽음을 보고서 더욱 세상과는 인연을 끊었으며, 지은 시고(詩藁)마저 모두 태워버렸다.
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임진왜란 때에는 어머니가 눈병으로 앞을 못 보고 다리가 아파 걸음을 걷지 못하자,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강도(江都)까지 가서 배를 얻어 호남에 피신하여 난을 면하였다.
친구의 아들이 포로가 되었으나 속환(贖還)할 돈이 없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노자를 털어 구하여준 일도 있다. 좌우에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를 써붙이고 일동일정을 그에 맞게 하였으나, 정철이 실각당한 뒤로는 더욱 세상에 뜻이 없어 술로만 세월을 보내었다. 양화도(楊花渡) 강가에 임시 거주하면서 사위 조영(趙嶸)과 함께 서로 의지하여 지냈는데, 술이 있으면 반드시 취해 쓰러지는 것을 한계로 삼았다. 그러면서 늘 말하기를 “병들어 앓지 않고 취해 누운 상태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는데, 그 소원대로 어느 날 술 취해 누워서 그대로 죽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석전유고』 2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