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초명은 성석인(成石珚)이었으나 국왕의 휘(諱)를 피하여 성석인(成石因)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자유(自由), 호는 상곡(桑谷). 할아버지는 판도총랑(版圖摠朗) 성군미(成君美)이고, 아버지는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이다. 어머니는 지신사(知申事) 나천부(羅天富)의 딸이다. 형들이 성석린(成石璘)·성석용(成石瑢)이다.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에서 지평(持平)·경연강독관(經筵講讀官)을 역임하였다. 다시 조선왕조에서 강원도도관찰사·충청도도관찰사를 거쳐 경연관·대사헌, 예문관대제학과 형조·호조·예조 등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예조판서로서 조정의 일을 의논 중에 졸도하여 순직하였다. 뒤에 우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