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5년(태조 4)에 정도전(鄭道傳) 등이 편찬한 『고려국사(高麗國史)』가 내용이 소략하고 궐루된 사실이 많았고 필삭(筆削)과 포폄(褒貶)의 불공정에 의하여 많은 오류를 범하였으며, 왕과 왕실의 참의(僭擬)한 칭호를 개서하는 등 문제점이 있었으므로 개찬의 논의가 일어났다. 즉, 태종 때 하륜(河倫)의 개수, 세종 즉위 초 유관과 변계량(卞季良)의 개수작업 등이 그것이다. 『수교고려사』는 1421년에 완성된 『고려국사』개수가 변계량의 주장으로 아직도 원 간섭기 이전의 왕과 왕실 칭호가 실록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1423년에 유관과 윤회에게 실록에 따라 수교하도록 한 것이다.
이 작업은 윤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개수작업은 불과 8개월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았는데, 이는 용어의 교정에만 그쳤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변계량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반포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한계로 인하여 고려사의 개수논의는 계속되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