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가락국(駕洛國), 곧 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 부른다. 수로왕릉은 2011년 7월 28일에 ‘김해 수로왕릉’으로 공식명칭이 변경되었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삼국유사』「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하고 있으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왕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무덤의 높이는 약 5m이다.
왕릉의 경내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과 안향각(安香閣)·전사청(典祀廳)·제기고(祭器庫)·납릉정문(納陵正門)·숭재(崇齋)·동재(東齋)·서재(西齋)·신도비각(神道碑閣)·홍살문·숭화문(崇化門) 등의 건물이 있다. 아울러 신도비·문무인석(文武人石)·마양호석(馬羊虎石)·공적비 등의 석조물이 배치되어 있다.
왕릉은 고려 문종 때에 부분적으로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 다시 퇴락해져서『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세종 28년(1446)에 다시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580년(선조 13)에 당시 영남관찰사이며 수로왕의 후손인 김허수가 수로왕비릉(허왕후묘)와 더불어 대대적으로 개축한 뒤였다. 수로왕비릉 역시 높이 5m정도의 원형봉토분으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내부의 구조는 움무덤〔土壙墓〕또는 돌덧널무덤〔石槨墓〕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지봉유설』에 따르면 왕릉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石室墓〕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지봉유설』에서는 임진왜란 때 수로왕릉이 도굴당했음을 밝히고 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647년(인조 25)에는 왕명에 의하여 허적(許積)이 묘비문을 지어 비를 세웠고, 1865년(고종 2)에는 숭선전을 중수하였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능소에서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 두 차례 제사를 크게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