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년(강종 1)에 태자에 책봉되어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고, 재위 기간은 1213년에서 1259년까지이다. 이름은 왕철(王㬚), 초명은 왕진(王瞋) · 왕질(王晊), 자는 대명(大命) · 천우(天祐)이다. 강종(康宗)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 비는 희종(熙宗)의 딸 안혜태후(安惠太后) 유씨(柳氏)이다.
46년의 재위 기간 동안 최씨(崔氏)의 무단 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였다. 1219년(고종 9) 최충헌(崔忠獻)의 죽음 이후에도 고종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崔瑀)가 정방(政房)을 통해 백관의 인사를 마음대로 결정하였다. 1258년(고종 45)에 최의(崔竩)가 살해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짐으로써 표면상으로 왕권이 복구되었으나, 여전히 실권은 김준(金俊) 등 무인 정권에 있었다. 최우, 최항(崔沆), 최의 3대의 최씨 정권과 김준의 무인 정권을 아래에서 고종은 무인 집정자의 정책 결정이나 의견에 맞서지 않는다는 철저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강화천도(江華遷都)는 고종은 원하지 않았으나 최우의 정치적 결정과 압박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잦은 민란과 거란 · 몽골의 침입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었다. 1216년(고종 3)부터 3년간 계속된 거란의 침입과 뒤이은 몽골의 장기적인 침입으로, 고종의 재위 기간은 고려 최대의 국난을 겪은 시기였다. 1231년(고종 18) 몽골의 침입이 시작되자 이듬해 1232년(고종 19)에 강도(江都)로 도읍지를 옮겨 장기적인 항전을 지속하였다. 1259년(고종 46)에 몽골에 강화를 청하기 위해 태자 왕전(王倎)을 몽골에 보냈으며, 무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화도의 내성과 외성을 헐게 하였다. 태자의 친조(親朝)와 성곽의 철거는 몽골에 대한 복속을 뜻하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몽골의 국왕 입조(入朝) 및 환도(還都) 요구에는 끝까지 응하지 않았고 태자 입조로 타협하였다.
재위 동안 절에 직접 거둥하여 불공을 드렸고 각종 불교 의례를 개설하는 데 특별히 힘썼다. 1236년(고종 23)에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격퇴하고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소실된 대장경판의 재각(再刻)에 착수하였다.
1227년(고종 14)에는 감수국사(監修國史) 평장사(平章事) 최보순(崔甫淳), 수찬관(修撰官) 김양경(金良鏡) · 임경숙(任景肅) · 유승단(兪升旦) 등에게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게 하였다.
전례 없는 전란과 천도, 무인 정권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 고종은 46년 간 재위하였는데 그것은 고려의 역대 왕 가운데 가장 오랜 재위 기간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가장 정치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정치적인 왕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인 정권의 부정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태자(왕전, 원종)의 왕위 계승을 가능하게 한 치밀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능은 강화 홍릉(江華洪陵)이며, 시호는 안효(安孝)이다. 1310년(충선왕 2)에 충헌(忠憲)이라는 시호가 증시(贈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