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헌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 무신 집정 이의민을 제거하고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역임한 무신.
이칭
초명
최란(崔鸞)
시호
경성(景成)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149년(의종 3)
사망 연도
1219년(고종 6)
본관
우봉(牛峯, 지금의 황해도 금천)
출생지
미상
주요 저서
미상
주요 작품
미상
주요 관직
양온령(良醞令), 추밀원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樞密院使吏兵部尙書御史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 교정별감(敎定別監)
관련 사건
1196년(명종 26) 이의민 제거
내용 요약

최충헌은 고려 후기 무신 집정 이의민을 제거하고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역임한 무신이다. 1149년(의종 3)에 태어나 1219년(고종 6)에 사망했다. 그는 피의 숙청을 통해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는 한편, ‘봉사십조(封事十條)’의 개혁책을 올리기도 하였다. 반대 세력의 저항을 평정하기 위해 도방(都房)·교정도감(敎定都監) 등 사적 권력 기구를 강화하였다. 이후 그의 권력은 4명의 국왕을 교체할 정도로 막강하였고, 4대 60여 년간 최 씨 무신 정권을 유지할 권력 기반을 닦았다.

정의
고려 후기, 무신 집정 이의민을 제거하고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역임한 무신.
가계 및 인적사항

본관은 우봉(牛峰). 초명은 최란(崔鸞). 아버지는 상장군(上將軍) 최원호(崔元浩)이다. 상장군 송청(宋淸)의 딸 송씨(宋氏) 부인에게서 장남 최이(崔怡: 초명은 최우(崔瑀))와 차남 최향(崔珦)을 낳았고, 강종(康宗)의 서녀(庶女) 정화택주(靜和宅主) 왕씨(王氏) 부인에게서 아들 최구(崔球)를 낳았으며, 첩으로는 수성택주(綏成宅主) 임씨(任氏)와 자운선(紫雲仙)이 있었다.

주요 활동

처음에 음보(蔭補)로 양온령(良醞令)이 되었다가,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저항 때 원수(元帥) 기탁성(奇卓誠)의 휘하에서 용감히 싸워 별초도령(別抄都令)에 발탁되었으며, 뒤이어 섭장군(攝將軍)에 올랐다.

1196년(명종 26) 4월 아우 최충수(崔忠粹), 생질(甥姪) 박진재(朴晉材) 등과 함께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이의민(李義旼)을 제거하는 한편, 그 일당과 잔당으로 지목된 문관 · 무관을 대량 학살 또는 귀양 보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왕에게 “적신(賊臣) 이의민이 일찍이 임금을 시해한 죄를 저지르고, 생민(生民)들을 괴롭히고 해를 끼쳤으며, 왕위[大寶]를 엿보기까지 했습니다. 저희는 오랫동안 그를 미워하였는데, 이제 국가를 위해 그를 토벌하였습니다. 다만 일이 누설될까 두려워서 어명을 요청하지 않았으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최충헌은 무신 정변에 참여하지 않은 무신으로서 집권에 성공하였는데, 이에 따른 무신들의 반발이 예상되었다.

이에 그는 아우 최충수와 함께 그동안 누적되었던 폐정(弊政) 개혁을 요구하는 ‘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려 집권의 명분을 삼으려 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①왕은 정전(正殿)으로 환어(還御)하라. ②필요 이상의 관원을 도태시켜라. ③토지의 점유를 시정하라. ④조부(租賦)를 공평히 하라. ⑤왕실에 공상(供上)을 금지하라. ⑥승려를 단속하고, 왕실의 고리대업을 금지하라. ⑦청렴한 주군(州郡)의 관리를 등용하라. ⑧백관(百官)의 사치를 금하고 검소 절약을 숭상케 하라. ⑨ 비보사찰(裨補寺刹) 이외의 사찰을 없애라. ⑩관리들의 아부를 지적하고, 인물을 가려 등용하라.

이 개혁책의 서두에서는 이의민의 제거를 정당화하였다. 최충헌 형제는 이의민을 의종(毅宗) 시해 및 왕권을 넘보았다는 대역(大逆)의 죄와 백성의 안집(安集)을 위협한 이유를 들어 살해하였고, 아울러 무신 정변 이후의 집권 무신 세력들을 처단하면서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그 과정에 대한 정당한 자기 입장은 ‘태조정법(太祖正法)’이었다. 이는 이전 집권 무신 세력들의 정권 유지의 제도적 장치와 정책 수행의 취지를 ‘구제(舊制)’의 수용에 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태조정법’의 표방은 명종 대 정치 운영의 파행에서 야기된 모순을 혁파하는 가운데 사직(社稷)의 보호자로서의 의의를 나름대로 부여한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그 다음의 10가지 조목은 잦은 정변으로 인한 정치 운영의 불안을 해소하고, 여러 정치 현안에 대한 모순 구조를 척결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도적 보완책이 제시되지 못하고, 이전의 집권 무신 세력들에 의한 개선책과 같이 다만 폐단의 주체에 대한 처결만을 지적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최충헌은 왕의 측근 50명을 추방한 뒤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197년(명종 27)에는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에 봉해졌고, 아버지 최원호에게는 봉의찬덕공신수태위문하시랑(奉議贊德功臣守太尉門下侍郞)을 내렸다. 그해 9월에 명종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국고를 낭비한다는 핑계로 왕을 창락궁(昌樂宮)에 유폐한 뒤 그의 아우 평량공(平凉公) 왕민(王旼)을 새로운 왕[神宗]으로 추대하였다.

신종이 즉위하면서 최충헌을 정국공신삼한대광대중대부상장군주국(靖國功臣三韓大匡大中大夫上將軍 柱國)으로 임명하였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영렬우성공신삼중대광문하시중(英烈佑聖功臣三重大匡門下侍中)을 증직하였다. 이로써 최씨 무신 정권이 확립되었다. 이때 아우 최충수가 자기 딸을 태자(太子: 뒤의 희종(熙宗))의 비(妃)로 삼으려는 것을 만류하자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형을 치려 하였다. 이에 박진재 · 노석숭(盧碩崇) 등과 함께 1,000여 명을 이끌고 나가 흥국사(興國寺) 남쪽에서 그 무리와 싸워 굴복시켰다. 최충수는 파평현(坡平縣) 금강사(金剛寺)에서 피살되었고, 그해 최충헌은 추밀원지주사지어사대사(樞密院知奏事知御史臺事)에 올랐다.

1198년(신종 1)에 노비 만적(萬積)의 저항을 평정하고, 1199년(신종 2)에는 병부상서지이부사(兵部尙書知吏部事)가 되어 문 · 무관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그해 황주목사(黃州牧使) 김준거(金俊琚) 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1200년(신종 3)에는 삼중대광수태위상주국(三重大匡守太尉上柱國)에 올랐다. 이 해에 도방(都房)을 설치하여 문 · 무관과 한량(閑良) · 군졸 중에서 월등하게 힘센 자를 선발하여 6번(番)으로 나누고 교대로 자기 집에 숙식시키면서 신변을 보호하게 하였으며, 외부에 출입할 때는 6번을 합쳐 지키게 하였다.

1201년(신종 4)에 추밀원사이병부상서어사대부(樞密院使吏兵部尙書御史大夫)가 되었고, 1202년(신종 5)에는 자기 집에 있으면서 문 · 무관의 전주(銓注: 인사 행정)를 행사하였다. 이때 왕은 아뢰는 대로 머리만 끄덕일 뿐이고, 전주를 맡은 이부병부판사(判事)도 정당(政堂)에 앉아 검열만 할 뿐이었다. 그해 수태부참지정사병부상서판어사대사(守太傅參知政事兵部尙書判御史臺事)를 거쳐, 1203년(신종 6)에는 중서시랑평장사이부상서태자소사(中書侍郎平章事吏部尙書太子少師)가 되었다.

1204년(신종 7)에 신종을 폐하고 태자[희종(熙宗)]를 옹립한 뒤, 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상주국판병부어사대사태자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上柱國判兵部御史臺事太子太師)에 올랐다. 왕은 최충헌을 특별한 예로써 대우하고 항상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불렀다.

1205년(희종 1)에는 최충헌에게 내장전(內莊田) 100결(結)이 하사되고, 특진우모일덕안사제세공신(特進訏謀逸德安社濟世功臣)의 호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제수하였으며, 진강군개국후(晉康郡開國侯)의 관작과 식읍(食邑) 3,000호에 식실봉(食實封) 300호를 내렸다. 이듬해 진강후(晉康侯)가 되고 흥녕부(興寧府)를 세웠다. 이때부터 궁궐을 출입하면서 평시 의복을 입고 일산(日傘)을 받들고 시종하는 문객(門客)을 3,000여 명이나 거느렸다.

1207년(희종 3)에 진강공(晉康公)을 더하였다. 이 해에 자신에게 불만을 품어오던 생질 박진재를 백령진(白翎鎭)으로 귀양 보내고 박진재의 문객들도 대거 유배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이규보(李奎報)를 등용하여 무신 정변으로 쇠퇴했던 문운(文運)의 진흥을 꾀하기도 하였다.

1209년(희종 5)에 청교역(靑郊驛)의 서리[吏] 3인이 최충헌 부자(父子)를 살해하려 한 사실이 발각되자 영은관(迎恩館)에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고 그 무리를 숙청하였다. 교정도감은 그 뒤에도 인사(人事) · 감찰(監察) · 징세(徵稅) 등 국정 전반을 장악할 수 있는 최 씨 정권의 최고 기관으로 존속하였으며, 최충헌은 스스로 그 장(長)인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1211년(희종 7)에 내시낭중(內侍郎中) 왕준명(王濬明) 등의 계책으로 궁궐에서 죽을 뻔하였으나, 도방의 구출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 일로 희종을 폐위하여 강화(江華)로 내쫓고 한남공(漢南公) 왕정(王貞)을 새로운 왕[강종(康宗)]으로 즉위시켰다.

1212년(강종 1)에는 흥녕부를 고쳐 진강부(晉康府)라 하였고, 자신은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文經武緯嚮里措安功臣)에 봉해졌다. 1214년(고종 1)에 최충헌의 처 임씨(任氏)는 수성택주(綬成宅主), 왕씨(王氏)는 정화택주(靜和宅主)가 되었다. 1218년(고종 5)에 나이 70세가 되어 궤장(几杖)이 하사되었고, 1219년(고종 6)에는 고종이 왕씨(王氏) 성을 내려 주기도 하였다.

의의 및 평가

최충헌이 이의민과 그 여당(與黨)을 제거하여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명종 대의 정치적 불안과 지방 사회의 계속된 저항에 따른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최충헌은 사회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하여 ‘봉사십조’를 제시하였다. 안으로는 명종 대의 잦은 정변에 따른 무신 세력들의 이합집산을 불식시켜 정권을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지방 사회의 동요를 무마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최충헌 정권 역시 이전 시기 무신 정권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그 자체가 새로운 수탈자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특히 경주를 중심으로 한 저항은 왕조 자체를 부정한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이라는 점에서 집권 무신 세력과 일반 지배층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최충헌의 정권 유지에도 중요한 걸림돌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경주 지역에 대한 강경 진압 이후 이전의 무신 정권보다 더욱 강력한 지배 구조를 구축하였다. 그 결과 지방 사회의 저항은 희종 대 이후 점차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최충헌 정권은 정권 유지를 확고하게 하려고 지배 기구를 재편하였는데, 그 일환이 교정도감 · 서방(書房) · 정방(政房) · 도방 · 가병(家兵) 등과 같은 사적 지배 기구의 확대였다. 이러한 기구들은 국가 권력의 유지보다는 최충헌 정권 자신의 영달이 우선적인 목적이었다. 최충헌은 기존의 관료 체제를 무력화시켜 1인 독재의 틀을 구축함에 따라 많은 인적 · 물적 토대가 필요하였다. 1216년(고종 3) 이후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입을 계기로 지금까지 누적되어 온 경제적 궁핍 때문에 지방 사회의 저항이 재발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경성(景成)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최충헌묘지명(崔忠獻墓誌銘)」

단행본

홍승기 편, 『고려무인정권연구』(서강대학교 출판부, 1995)
김당택, 『고려의 무인정권』(국학자료원, 1999)
신안식, 『고려 무인정권과 지방사회』(경인문화사, 2002)

논문

김당택, 「정중부·이의민·최충헌」(『한국사시민강좌』 8, 일조각, 1991)
김대중, 「최충헌정권의 성립 배경: 최충헌과 이의민의 관계 변화와 관련하여」(『진단학보』 93, 진단학회, 2002)
박재우, 「고려 최씨정권의 권력행사와 왕권의 위상」(『한국중세사연구』 46, 한국중세사학회, 2016)
신수정, 「고려 무신정권기 최충헌 가문의 혼인」(『인문과학연구』 26, 성신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8)
신안식, 「고려 신종대 최충헌정권의 대민시책과 지방사회」(『사학연구』 53, 한국사학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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