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을 설치한 목적은 문사를 우대하겠다는 뜻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고사(故事)에 밝고 식견이 높은 문사를 고문(顧問)에 등용함으로써 정치에 활용하고자 했던 데 있었다. 최씨정권은 사병과 같은 무력적 기반을 통해 정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지만, 대외관계에서 문사들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몽전쟁(1231∼1259)이 지속되면서 표문(表文)과 서 · 장(書狀) 등 대몽골 외교문서 작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사항으로 급부상 되었다. 결국, 서방은 최씨정권이 자신의 정권을 계속 유지, 강화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씨정권은 전 · 현직관과 무사를 위주로 편제한 도방(都房)과 문사를 중심으로 편제한 서방으로 문무쌍벽(文武雙璧)의 숙위기관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서방의 설치로 문사들이 무신정권 수립 이후 자연스럽게 현실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최씨정권에서 서방의 비중과 역할은 중요하였다. 최씨정권의 제3대 집권자 최항(崔沆)이 죽자 서방은 다른 권력기구인 야별초(夜別抄) · 신의군(神義軍) 및 도방과 더불어 밤낮으로 경비를 하였다. 그리고 최항의 아들 최의(崔竩)를 제4대 집권자로 추대하였다.
최씨정권을 지탱시키는 데 한 축이 되었던 서방은 최씨정권이 몰락한 뒤에도 김준(金俊)에게 계승되었다. 그리고 다시 임연(林衍)을 거쳐 임유무(林惟茂) 집권기까지 존속되었다. 서방은 최씨정권의 권력기구인 도방 및 정방과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
즉, 서방과 도방은 숙위기관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서방이 문사 집단인데 비해, 도방은 무사를 중심으로 편제되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또한, 서방은 숙위기관이고 정방은 인사행정기관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양자가 모두 문사 집단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특히, 서방과 정방은 최씨정권이 무신정변 이후 소외되었던 유자(儒者)와 문사를 대거 회유하는 의미와 더불어 무인지배체제의 약점을 보완하려는데 활용된 사적 지배기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