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신(權臣) 임연(林衍)의 아들이다.
1270년 2월 원종이 원나라에 갔을 때 순안후(順安侯) 왕종(王琮)이 국사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임연이 죽자 대신해 정권을 잡았다.
원종이 상장군 정자여(鄭子璵)를 보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이에 따르지 않을 목적으로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한 재추(宰樞) 3품 이상과 현관(顯官) 4품 이하 및 대성(臺省)으로 하여금 가부를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나 모두 왕명을 따르자고 하니 이에 분노해 여러 도에 수로방호사(水路防護使) 및 산성별감을 나누어 보내 백성들로 하여금 왕명을 거역하게 하였다. 또 장군 김문비(金文庇)에게 야별초를 거느리고 교동(喬桐)에 주둔하게 해 왕의 군사를 막게 하였다.
앞서 임연이 보낸 야별초는 경상도에 이르러 백성을 독촉해 여러 섬에 들어가 지키게 하자, 안찰사(按察使) 최간(崔澗)이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 주열(朱悅), 판관 엄수안(嚴守安)과 함께 모의해 야별초를 잡아 금주(金州)에 가두었다.
그리고 왕이 귀국하기를 기다리다가 왕이 국경 안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잇길로 행재소에 이르렀으며, 전라도안찰사 권단(權㫜)과 충청도안찰사 변량(邊亮)도 모두 왕의 명을 받들었다.
이 때 임유무는 정사를 장인인 사공(司空) 이응렬(李應烈)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치사한 송군비(宋君斐) 등에게 물어 결단했는데, 자형인 어사중승(御史中丞) 홍문계(洪文系)와 직문하성(直門下省) 송송례(宋松禮)는 겉으로는 따르는 척했으나 실제로는 이를 분하게 생각하였다.
이것을 안 왕이 이분성(李汾成)을 보내 은밀히 타이르자, 송송례와 홍문계가 삼별초를 모아 사직을 호위하는 대의를 설명한 뒤 이들을 거느리고 유무를 습격해 자형인 대장군 최종소(崔宗紹)와 함께 사로잡아 저자에서 목을 베고, 이응렬·송군비, 족숙(族叔) 송방예(宋邦乂), 이성로(李成老), 외사촌동생 이황수(李黃綏) 등은 유배에 처하였다.
또한 그들의 권력 기구였던 서방삼번(書房三番)과 성조색(成造色)을 폐지하였다. 이에 조야가 크게 기뻐하였으며, 어머니 이씨와 형 임유간(林惟幹), 아우 임유거(林惟柜)·임유제(林惟提) 등은 모두 붙잡혀 원나라로 압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