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륙환도 ()

고려시대사
사건
대몽항쟁기(對蒙抗爭期)에 있어서 강도(江都: 江華京)에서 개경(開京)으로 도읍을 옮기라는 몽골의 요구, 혹은 1270년(원종 1) 강도에서 개경으로 도읍을 옮긴 역사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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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출륙환도는 섬인 강화도에서 나와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고려의 강화천도 이후 지속된 몽골의 요구, 혹은 1270년(원종 1)에 개경으로 환도한 사건이다. 고려는 출륙환도와 함께 인접한 섬에 백성들을 보내 놓고 방어하는 해도입보책을 실시하여 장기전을 유도하여 몽골군의 공격 의지를 약화시켰다. 이에 몽골은 고려와의 전투나 교섭에서 최우선 사항으로 출륙환도를 요청하였다. 이처럼 출륙환도는 여·몽전쟁에 있어서 최대의 외교쟁점이었으며, 출륙환도 거부가 대몽항전의 핵심이었다.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출륙환도하여 몽골에 예속되었으나, 이에 반대한 삼별초의 항쟁이 이어졌다.

정의
대몽항쟁기(對蒙抗爭期)에 있어서 강도(江都: 江華京)에서 개경(開京)으로 도읍을 옮기라는 몽골의 요구, 혹은 1270년(원종 1) 강도에서 개경으로 도읍을 옮긴 역사적 사건.
개설

출륙환도(出陸還都)는 몽골의 침입에 대한 군사 · 외교적 대응으로 고려에서 단행했던 강화천도(江華遷都)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집권자 최우(崔瑀)는 1232년( 고종 19) 6월 16일에 전격적으로 강화천도 방침을 확정하였으며, 같은 해 7월 7일 국왕 고종이 강화도로 이주함으로써 단행되었다. 강화천도는 고려 대몽항쟁의 한 방편이었던 ‘해도입보(海島入保)’와 궤를 같이 한다. 그 이후로 고려 정부는 강화도를 거점으로 몽골에 저항하였으며, 몽골은 강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오라는 요구를 계속하여 출륙환도는 고려와 몽골 간의 최대 외교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역사적 배경

고려의 대몽항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 치열하게 펼쳐진 이민족과의 장기 항쟁이었다. 최씨정권은 화 · 전(和戰) 양면에 걸친 항전논리를 나름대로 수립하여 전쟁을 지휘하였다. ‘전(戰)’ 측면에서는 부위군(府衛軍) · 주현군(州縣軍)의 군제개편을 통해서 삼별초(三別抄)와 주현별초군(州縣別抄軍)을 중심으로 장기 항전을 이끌었으며 주현민(州縣民)의 자발적인 항쟁을 독려하였다. ‘화(和)’ 측면에서는 정권 내부의 화의론자(和議論者: 講和論者)를 통해서 대몽외교를 효과적으로 펼쳐 몽골군을 철군시켰다. 또한 몽골이 집요하게 요구해 왔었던 몽고육사(蒙古六事) 가운데 세공(歲貢)납부 · 독로화(禿魯花)파견을 제외한 나머지 사안들의 이행을 지연시키는 한편 출륙환도 요구만큼은 완강히 거부하면서 산성 · 해도입보항전(山城 · 海島入保抗戰)을 지속시켰다. 이와 같은 최씨정권의 독특한 항전방식은 같은 시기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특이한 것이었다. 출륙환도 거부가 대몽항전의 핵심이었던 만큼 출륙환도의 이행은 고려 무신정권의 몰락과 몽골제국에의 실질적인 신속(臣屬)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경과

해도입보책(海島入保策)은 최씨정권의 장기전 구상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써 최씨정권이 멸망할 때까지 단 한번도 그 전략을 변경한 적이 없었을 만큼 최씨집권자가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항몽전략이었다. 그리고 몽골이 침입한 후 철군조건으로 제시한 최우선 사항이 ‘출륙환도를 비롯하여 해도에서 백성들을 데리고 나올 것’이었음을 통해서 해도입보는 여 · 몽 사이의 전투에 있어서나 강화교섭에 있어서 핵심적인 논쟁거리였다.

해도입보책은 적극적인 항몽자세는 아니었지만, 고려 왕업(王業)을 유지하고 장기전을 유도하여 몽골군의 공격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몽골군은 강도 조정의 출륙환도 약속만으로도 철군을 하기도 하였다. 최씨정권은 멸망하는 순간까지 출륙환도를 거부하고 해도입보책에 의하여 강도시대를 이어가려고 하였다. 훗날 삼별초는 1270년 강도 조정의 출륙환도에 반대하여 진도로 거점을 옮겨 저항을 계속하였다. 삼별초의 항전은 고려의 자주성(自主性)을 살린다는 측면에서 긍정적 의미를 가지지만 한편으로는 계속하여 전란을 야기하였다는 측면에서는 부정적 의미도 있다.

출륙환도는 몽골군의 침공과 철수에 있어서 가장 큰 명분이 되었다. 1232년(고종 19) 8월 몽골의 제2차 침공 때 사르타이〔撒禮塔〕는 고려가 출륙환도를 시행할 뜻이 없는 것을 알고 강도직공(江都直攻)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사르타이는 전함을 건조하며 태주(泰州)의 향리(鄕吏) 변려(邊呂)를 사로잡아 강화로 가는 수로를 물어 보았으나 그가 매우 험하다고 할 뿐 끝내 발설하지 않으므로 포기하였던 적도 있다.

1233년(고종 20) 4월 24일 몽골 황제가 조서를 고려에 보내 고려가 범한 5가지 죄를 추궁하면서 출륙환도와 더불어 국왕친조 등을 요구하였다.

1239년(고종 26) 이후 여몽 사이에 강화교섭이 다시 활발히 전개되었다. 강도 조정은 1년에 2회 몽골에 공물을 바치는 세공외교를 전개하여 대몽강화의 틀을 잡았지만, 출륙환도를 이행할 의사가 없었다. 고려가 계속해서 출륙환도를 거부하고 몽골 태종(太宗)이 친히 요구한 몽고육사마저 이행하지 않자 탕꾸〔唐古〕가 이끄는 몽골군은 북계(北界)에서 국지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하였으며, 1240년(고종 27) 4월 이후에 몽골군이 창주(昌州) · 삭주(朔州)를 공함하기도 했다. 1240년(고종 27)에는 몽골 태종이 강도조정에 조서를 보내 출륙환도와 국왕친조 등을 다시 요구하였다.

최씨정권의 제3대 무신집정 최항(崔沆)은 집권한 이후 의례적인 세공사(歲貢使)를 몽골에 정기적으로 파견하여 임시적 대몽강화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제2차 대공위(大空位) 시대를 마감하고 몽골 헌종(憲宗)이 등극하여 강도조정에 출륙환도와 몽고육사 이행을 강력히 요구했을 때 최항이 그것을 거부하여 여 · 몽 간에 다시 전쟁이 발발하였다. 헌종의 숙부 예꾸〔也古〕를 수반으로 하는 제5차 몽골 침입군이 1253년(고종 40) 4월에 침입을 개시하고 8월에는 서해도(西海島)의 중요한 요새였던 양산성(椋山城)과 중부 내륙의 관문이었던 동주산성(東州山城)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고려 측에 출륙환도를 종용하였다.

이후 몽골이 1254년 제6차 침입을 개시하자 강도 조정은 1255년(고종 42) 6월 9일에 시어사(侍御史) 김수강(金守剛)과 낭장(郎將) 유자필(庾資弼)을 몽골에 보내 공물을 바치게 하며 세공외교를 펼쳤다. 이때 시어사 김수강은 몽골 헌종에게 세공을 바치고 군신출륙(君臣出陸), 태자입조(太子入朝) 등을 약속하며 몽골군 철수를 요청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고려는 몽골의 침공이 시작되면 출륙환도를 약속하였지만, 일단 몽골군이 철군을 하면 이를 지연시키거나 이행하지 않고 다시 항전을 계속하였다. 무신정권기 출륙환도는 여 · 몽전쟁에 있어서 최대의 명분 가운데 하나였으며 무신정권이 존속하는 한 이행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과

출륙환도는 1258년 3월 무오정변(戊午政變)으로 최씨정권이 몰락하고 1259년 4월 몽골과의 강화가 체결되면서 실행에 옮겨지는 듯했다. 그러나 당시 무신집정자였던 김준(金俊: 초명 金仁俊)은 태자친조(太子親朝)는 찬성하면서 즉각적인 출륙환도는 거부하였다. 그는 삼별초 출신 무관을 통해서 몽골 헌종(憲宗)과 담판을 벌여 출륙환도를 지연시키기도 하였다. 출륙환도를 거부하거나 지연시키려는 무신정권의 입장은 김준정권을 거쳐 임연정권(林衍政權) · 임유무정권(林惟茂政權)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임연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몽골 세조(世祖)의 외교적 압력으로 다시 복위한 원종(元宗)이 몽골에 입조하여 몽골군을 이끌고 고려에 돌아와 출륙환도 및 삼별초해산령을 지시함으로써 1270년 출륙환도가 단행되었다. 출륙환도의 실행은 그것에 거부한 삼별초의 항쟁으로 이어짐으로써 고려가 개경정부와 삼별초 항몽정부로 양분화 되어 투쟁하는 형국으로 나아갔다.

의의와 평가

고려의 대몽항전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해도입보책은 고려의 항전을 장기적으로 연장하는데 의의가 있었다. 출륙환도는 고려의 대몽항전을 포기하는 일이었으므로 자주성에 커다란 손상을 가져왔다. 그러나 출륙환도 거부가 자주적인 의지는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항전 기간이 길어짐으로써 민이 입는 피해가 컸기 때문에, 출륙환도는 좀 더 조기에 실현되었어야 한다는 강화론의 입장에서 비판받기도 한다.

참고문헌

『몽고침입에 대한 최씨정권의 외교적 대응』(강재광, 경인문화사, 2011)
『고려시대의 정치변동과 대외정책』(이정신, 경인문화사, 2004)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윤용혁, 일지사, 2000)
『고려후기 외교사연구』(장동익, 일조각, 1994)
『고려대몽항쟁사연구』(윤용혁, 일지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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