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崔瑀)∼최항(崔沆)집권기 때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던 최씨정권의 가노(家奴) 출신 별장(別將) 김준(金俊)은 최의(崔竩)집권기에 들어와 최의 측근의 견제를 받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 그는 반최의연대세력(反崔竩連帶勢力)을 결집하여 무인집정 최의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면서 왕정복고를 기치로 내걸고 1258년(고종 45) 3월에 무오정변(戊午政變)을 일으켰다. 이 정변으로 4대 62년간에 걸친 최씨정권이 종말을 고하였다.
무오정변의 기본적인 기치는 왕정복고와 민생구제에 있었다. 그러나 정변이 성공한 뒤 왕정복고의 대의명분은 희석되었고 크고 작은 권력투쟁 과정을 거쳐 점차 김준의 권력이 비대해지면서 새로운 무신정권이 탄생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김준이 항몽(抗蒙)을 다시 외치고 전쟁을 준비하자 국왕 원종과 격한 갈등을 빚으면서 국왕 주도 하에 무진정변(戊辰政變)이 발발하게 되었다.
1258년 11월에 김준은 무오정변을 함께 성공시키고 먼저 집권하였던 문신 유경(柳璥)을 정치일선에서 끌어내리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동생인 김승준(金承俊)을 우부승선(右副承宣)에 임명하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등 일가가 권력을 독점하였다. 김준은 권력을 잡은 후 무오정변의 동지이자 양아들이었던 임연(林衍)을 소외시켰다. 1264년(원종 5) 8월원종이 몽고에 입조(入朝)할 당시 최고 권력기구였던 교정도감(敎定都監)의 장(長)인 교정별감(敎政別監)이 되어 국사(國事)를 감독하였다. 이후 김준은 해양후(海陽侯)에 책봉되어 1268년 12월까지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면서 전국 각지에 농장을 늘리고 항몽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몽고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김준정권에 대해 많은 반대세력이 형성되었다.
한편, 실질적인 왕정복고를 갈망하던 국왕 원종은 무오정변에 가담했던 세력과 원나라와 관계를 원만하게 하고자 김준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원종은 김준을 제거할 세력들을 규합하였는데, 그 주축은 국왕 측근의 강윤소(康允紹)를 중심으로 한 환관세력과 김준으로부터 소외된 임연을 비롯한 반김준세력(反金俊勢力)이었다. 김준을 타도하는데 환관세력이 포함된 것은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난 국왕이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문·무 관료라기보다는 자신의 주변에 있었던 환관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임연이 주축이 된 것은 그가 김준과 함께 무오정변을 성공시켜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준의 아들들이 그를 견제하고 멀리했던 데서 연유한다.
무진정변 거사일은 원의 사신이 환국하는 1268년 12월 병신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날 원의 사신은 송별연에 참가하지 않고 바로 원으로 돌아갔으므로 거행되지 못하였다. 다음날 환관들이 김준을 만나 원종이 편찮아 영공(令公: 무신집권자의 별칭)을 급히 부른다고 거짓으로 꾸며 그를 궁궐의 편전으로 유인해 격리시킨 후 암살하였다. 이때 김준은 국왕이 돈으로 매수하였다는 김상(金尙)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편전에서 김준 제거가 성공하자 대궐 밖에서 임연에게 포섭되어 대기하고 있던 야별초가 김준의 여러 아들들과 김준정권의 실력자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김준의 둘째 아들인 김주(金柱, 金用才)가 도방(都房)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맞섰으나 사로잡혀 주살되었다. 이로써 무오정변 이후 10년간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김준세력은 소멸되었다.
무진정변에서 김준세력이 대부분 제거됨으로써 왕정이 복고될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연은 처음 거사 때의 목적이었던 왕정복고와는 달리 국왕의 측근세력인 환관을 제거하고 무신정권을 유지하려 했다. 이때 임연은 자신이 환관세력을 없앤 것은 그들이 원종의 사주를 받아 자신을 살해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원종의 왕정복고 시도에 대한 보복으로 안경공 왕창(安慶公 王淐)을 새 국왕에 옹립하고, 1269년(원종 10) 6월원종을 별궁으로 옮겨 폐위시켰다. 이후 스스로 교정별감이 되어 권력을 틀어쥐었다.
그러나 임연은 원종 폐위를 비난하던 원 세조의 반대에 부딪쳐 원종을 복위시킬 수밖에 없었고, 김준정권을 함께 붕괴시켰던 조윤번(趙允璠) 세력을 몰락시킴으로써 반대세력이 늘어났다. 또한 서북면(西北面)에서 최탄(崔坦)·한신(韓信) 등이 반란을 일으켜 원에 귀부함으로써 임연의 항몽정책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러한 불안한 정국을 극복하지 못하고 임연은 1270년(원종 11) 3월 등창으로 병사하였다. 그의 정권은 아들 임유무(林惟茂)에게 세습되었으나 왕정복고와 출륙환도(出陸還都)를 염원하던 반임연세력(反林衍勢力)에게 곧 붕괴되었다.
무진정변은 고려 무신정권의 마지막 항몽세력인 임연정권을 성립시킨 정변이었다. 이 정변으로 김준에서 임연으로 권력자가 바뀌었으며 과거 최씨정권의 가노(家奴) 출신 무신들이 대부분 제거되어 천민 출신 정치인들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아울러 원 세조의 후원을 받던 원종과 국왕을 견제하던 임연이 항몽·친몽의 노선 차이를 두고 극하게 대립하여 원종폐위, 원종복위사건을 겪음으로써 향후 무신정권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