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주천도(福州遷都)는 원나라 말엽 홍건적의 발흥이라는 동아시아 정세의 변동과 연관되어 있다. 홍건적은 홍두적(紅頭賊)·홍적(紅賊)이라고도 하는데, 머리에 붉은 수건〔紅巾〕을 둘렀으므로 홍건적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13세기 전반 한족(漢族)이 중심이 되어 하북성(河北省) 영평(永平)에서 몽고족(원)의 지배에 대한 저항을 시작하였다. 당시 한산동(韓山童)·유복통(劉福通) 등이 홍건적의 유명한 지도자였으며 이들은 원의 통치질서를 크게 와해시켰다.
홍건적의 일부는 원나라 군사에 쫓겨 요동 지역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였다. 홍건적의 고려 침공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1359년(공민왕 8) 12월의 제1차 침공과 1361년 9월의 제2차 침공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 홍건적 제2차 침입과 연관하여 발생한 사건이 복주천도이다.
1361년 10월, 원나라의 공세로 하북지방으로 퇴로가 막힌 홍건적의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를 지도자로 하는 10여 만의 군사가 두 번째로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들은 빠른 속도로 고려의 성들을 함락시키며 개경에 접근하여 11월 중순에 절령책(岊嶺柵, 자비령)을 지나 하순에는 개경을 점령하였다. 고려의 복주남천은 바로 이러한 홍건적의 제2차 침공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한편, 홍건적은 개경에 입성해 만월대를 불태우는 등 잔학한 행위를 하였으나, 그 뒤 2개월간 더 이상 남진하지 않았다. 1361년 12월에 공민왕은 복주로 피난하여 그 곳을 임시 수도로 삼고 홍건적에 대한 반격을 명하는 교서를 내렸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으로 삼고 이듬해인 1362년 정월에 동교(東郊)의 천수사(天壽寺,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소재)로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이 지휘하는 20만 병력을 집결시켜 개경을 포위하도록 했다.
고려군은 그해 1월 중순이 되자 눈이 많이 내려 방비가 소홀해진 틈을 타 사방에서 공세를 펼쳤다. 이러한 개경입성전투로 홍건적은 사유·관선생 등 지휘자를 포함하여 전사자 10만명 정도를 남기고 급하게 퇴각하였다. 이에 따라 복주로 몽진했던 공민왕도 50여 일만에 개경으로 환도(還都)하였다.
공민왕은 복주천도 후 개경을 회복하였으나, 고려가 받은 피해는 상당하였다. 홍건적이 지나갔던 지역들과 50여 일간 점령했던 개경 등의 지역에서 약탈이 심했다. 개경을 회복한 뒤에 총병관 정세운이 왕위찬탈을 노리던 김용(金鏞)의 음모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원나라와 내통한 부원세력(附元勢力)이 공민왕을 제거하고자 흥왕사의 변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불안한 정치상황은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위축시켰으며,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무인 세력이 대두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한편 공민왕이 임시수도로 삼아 머물렀던 복주는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