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우봉(牛峯). 초명은 최만전(崔萬全). 최우(崔瑀)의 서자이다. 창기(娼妓) 서련방(瑞蓮房)의 소생으로, 처음에 송광사(松廣寺)에서 중이 되어 선사(禪師)가 되었다가 쌍봉사(雙峯寺)로 옮긴 뒤 무뢰승(無賴僧)을 모아 문도(門徒)를 삼고 재화 늘리는 일을 일삼았다.
1248년(고종 35) 아버지의 명으로 환속해 좌우위상호군·호부상서가 되었으며, 또 아버지의 명으로 임익(任翊)에게 글을 배우고 권위(權韙)에게 예(禮)를 익혔다. 뒤이어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고 아버지에게 가병(家兵) 500여 명을 나누어 받았다.
이듬 해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정권을 잡고 은청 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태자빈객(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吏兵部尙書御史大夫太子賓客)이 되고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를 겸하며 교정별감이 되었다.
최항(崔沆)은 특히 시기심이 많아 평소에 민심을 얻었던 지추밀원사 민희(閔曦), 추밀원부사 김경손(金慶孫)을 귀양 보내고, 전 추밀원부사 주숙(周肅)과 형부상서(刑部尙書) 박훤(朴暄)을 죽였다. 1251년에는 계모 대씨(大氏)를 과거의 사감으로 독살하고 귀양 보냈던 김경손을 죽였다.
집권 초기에는 각 지방의 별공(別貢: 고려시대 특수한 토산물을 현물로 받던 세)과 어량선세(魚梁船稅)를 면제하고, 각 지방에서 가렴주구를 일삼던 교정도감의 수획원을 소환하고 그 임무를 안찰사에게 맡기는 등 인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차츰 호사와 향락을 일삼으며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
몽골에 대한 정책으로는 몽골의 강화(江華)로부터의 출륙(出陸) 요구에 응하는 것처럼 1250년에 승천부(昇天府: 지금의 경기도 개풍)에 새 궁궐을 지었으나, 1252년에 왕이 그 곳에 가서 몽골 사신을 만나려 하는 것을 굳이 반대하는 등 강경책을 썼다. 그 동안 왕이 문하시중을 삼고 진양후(晉陽侯)에 봉하려 하는 것을 사양했으며, 1253년에도 문하시중 판이부어사대사(門下侍中判吏部御史臺事)를 삼았으나 또한 사양하였다.
그 해에 몽골의 야굴(也窟)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는데, 이 때 몽골군에 있던 종실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으로부터 태자나 왕자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보내 회군을 청하라는 권고의 글이 왔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이 전국을 유린하자 왕이 승천부의 새 궁궐에 나가 몽골의 사신을 맞이함으로써 한때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1254년에 왕이 부(府)를 열게 했으나 사양했으며, 뒤이어 중서령 감수국사가 되었다. 1256년에 제중강민공신(濟衆康民功臣)에 봉해졌다. 죽은 뒤에 진평공(眞平公)에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