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때 삼성육부(三省六部)의 중앙관제가 성립함에 따라 설치된 내사성(內史省)의 장관인 내사령(內史令)의 후신이다. 문종 때 중서성(中書省)으로 관부의 명칭이 바뀜에 따라 직명도 중서령(中書令)으로 개칭되었으며, 정원은 1인이었다.
중서령의 명칭은 1295년(충렬왕 21) 도첨의령(都僉議令)으로 바뀌었다가 원의 중서령을 피하여 판도첨의부사사(判都僉議府使事)로 되었고 뒤에 영도첨의(領都僉議)가 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중서령으로 복구되었고 1362년에 영도첨의로 개칭되었으며 1369년에 영문하(領門下)로 고치고 우왕 때에 판문하(判門下)로 되었다.
중서령의 관계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이나 상서령(尙書令)과 함께 종1품으로 같은 품직(品職)이지만, 치사(致仕)와 추증(追贈)으로만 수여하고 실직이 아니었으므로 대개 문하시중이나 상서령을 역임한 사람이 임명되어 소위 인신지극(人臣之極: 신하로서 최고위의 지위)을 이루는 관직이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고려의 3성 6부제(三省六部制)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 고려의 3성 6부는 당(唐)의 제도를 그대로 수용하여 운영한 것이 아니라 중서성과 문하성(門下省)을 합친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이라는 단일기구와 상서성(尙書省)으로 구성되어 실제로는 2성 6부제로 운영되었다는 견해가 정설이다. 이에 따르면 중서령은 중서문하성의 최고 관직이 된다. 이에 대해 고려의 3성이 당제와 마찬가지로 중서성·문하성·상서성으로 이루어져 3성 6부제로 운영되었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중서령은 중서성의 최고 관직이 되어 시각의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