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헌(崔忠獻)이 집권한 직후인 1198년(신종 1)과 이듬해에 각각 예부시랑으로 조공사(朝貢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다.
1211년(희종 7) 상장군이었던 정방보는 최충헌을 살해하려 모의한 사건에 관련된 사약(司鑰) 정윤시(鄭允時) 및 환관들을 국문하여 내시낭중(內侍郎中) 왕준명(王準明) 등 주모자를 색출하였다. 1215년(고종 2) 추밀원부사로 있을 때 최충헌이 별제(別第)로 이사하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使) 금의(琴儀)와 함께 최충헌을 호종하였다.
거란이 침입하자 1217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서 정숙첨(鄭叔瞻) 대신에 원수가 되어 개경을 방어하였고, 조충(趙冲)과 함께 염주(鹽州)에서 적을 퇴각시켰다. 이듬해 안주(安州: 황해도 재령)에 있는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군하였으나 태조탄(太祖灘: 평안북도 박천)에서 크게 패하여 어사대의 탄핵으로 파면되었다.
1220년 평장사에 이르렀으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최우에 의해 안동부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치사(致仕)하였으며 1226년(고종 13) 죽었다.
사후에 고종이 정방보의 시호를 양평공(襄平公)이라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