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이름은 정양필(鄭良弼)이며, 자는 사도(思道)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정사도(鄭思度)라 하였다가 공민왕 때 다시 정사도(鄭思道)로 고쳤다. 연일(延日: 경상북도 포항시 영일읍) 출신이다. 증조부는 정균지(鄭均之), 조부는 정윤(鄭潤), 아버지는 정유(鄭侑)이다. 어머니 채씨(蔡氏)는 채유길(蔡惟吉)의 딸이며 경원군부인(慶原郡夫人)에 봉해졌다.
1347년(충목왕 3)에 대언(代言)으로 정방 제조(政房提調)가 되었으며, 1348년에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여 시와 부를 시험하여 박형(朴形) 등 52명과 10운 시를 시험하여 김득제(金得齊) 등 46명을 선발하였다.
또한 1361년(공민왕 10) 제2차 홍건적 침입이 있었을 때, 전직 밀직제학으로서 김규(金㺩)와 함께 절령책(岊嶺柵)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적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였다.
1365년에는 경상도순문사에 임명되어 합포(合浦: 마산)에 있었는데, 마침 최영(崔瑩)이 신돈(辛旽)의 참소를 입고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에서 계림윤(鷄林尹)으로 전보되어 경주에 오게 되었다. 왕의 조처에 불만을 가진 신돈이 다시 일을 꾸며 보고하고 당류(黨類) 이득림(李得霖)을 경주에 보내어 최영을 사죄(死罪)로 엮어 죽이려고 하자, 이에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그 뒤 1368년에는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있는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전(影殿)이 협소하다고 하여 마암(馬巖)으로 옮겨 짓도록 하였다. 이때에 정사도는 첨서밀직(僉書密直)으로 있었는데, 첨의시중(僉議侍中) 유탁(柳濯)의 제안에 따라 동지밀직(同知密直) 안극인(安克仁)과 함께 영전을 옮겨 짓는 일은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낭비하는 것이므로 이 역사를 중지할 것을 건의하다가 왕의 비위를 건드려 순군옥에 일시 갇혔다가 곧 석방되었다.
1371년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진되어 명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갔다왔으며, 1375년(우왕 1)에는 당시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을 죽이려 하였다고 의심받아 정몽주(鄭夢周)·김구용(金九容)·이숭인(李崇仁)·임효선(林孝先)·염정수(廉廷秀)·염흥방(廉興邦)·박형(朴形)·이성림(李成林)·윤호(尹虎)·최을의(崔乙義)·조문신(趙文信)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1379년 향년 62세로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