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5년(원종 5) 17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266년(원종 7) 19세 때 과거[春場]의 을과(乙科)에 장원 급제하여 지후(祗候)가 되었으며, 1279년(충렬왕 5) 전중시사(殿中侍史)를 거쳐 예빈윤(禮賓尹)이 되었다.
충선왕이 세자였을 때인 1290년(충렬왕 16)에 정가신(鄭可臣)과 함께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조열대부(朝列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1294년(충렬왕 20)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지공거(知貢擧) 안향(安珦)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윤안비(尹安庇), 조연수(趙延壽), 이언충(李彦冲), 김광식(金光軾), 홍유(洪侑), 신천(辛蕆) 등을 선발하였다.
그 뒤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첨광정원사(僉光政院事), 1325년(충숙왕 12)에 추성수정보리공신 삼중대광 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여흥군(推誠守正保理功臣三重大匡僉議政丞右文館大提學驪興君)에 제수되었고, 1326년(충숙왕 13)에 승진하여 판첨의부사(判僉議府事)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에 봉해졌다.
1323년(충숙왕 10)에 가락군(駕洛君) 허유전(許有全) 등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충선왕의 환국(還國)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지었다. 이 문장은 명문으로, 그 뜻이 간절하고 때로는 애통한 느낌을 들게 하였다. 그러나 심왕(瀋王) 무리의 간계(奸計)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민지는 정가신(鄭可臣)이 지은 『천추금경록(千秋今鏡錄)』 7권을 권보(權溥)와 증수하여 태조 왕건의 조상인 호경대왕(虎景大王)으로부터 원종까지의 역사를 7권으로 적고 세계도(世係圖)를 붙인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와 국조(國祖) 문덕대왕(文德大王, 호경)으로부터 고종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 42권을 편찬했으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 이제현(李齊賢)은 민지를 고종대의 이규보(李奎報), 원종대의 김구(金坵)를 잇는 대표적 문장으로 평가하였다. 1295년(충렬왕 21) 왕명으로 인각사(麟角寺)의 보각국사( 『삼국유사』의 일연) 비의 비문을 지었다. 그밖에도 「금강산유점사사적기(金剛山楡岾寺事蹟記)」, 「풍악산장안사사적기발(楓岳山長安寺事蹟記跋)」, 「보개산석대기(寶盖山石臺記)」 및 「오대산월정사사적(五臺山月精寺事蹟)」(1307), 「국청사금당주불석가여래사리영이기(國淸寺金堂主佛釋迦如來舍利靈異記)」(1315) 등을 썼다. 저서로는 『묵헌집(默軒集)』이 있다.
시호는 문인공(文仁公)이며,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묘지명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