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거의 보좌역으로 정원은 1인이다. 972년(광종 23)에 둔 적이 있으나 곧 폐지되었고, 1083년(순종 1)에 다시 두어 이후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존속하였다.
1315년(충숙왕 2) 지공거가 고시관(考試官)으로 개칭됨에 따라 동고시관으로 바뀌었다가 1330년(충숙왕 17)에 다시 환원되었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에는 제시(諸寺)의 3품관인 경(卿)·감(監)으로 임명하였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중서문하성과 중추원, 상서육부 및 국자감 등의 3·4품 관원 가운데 학식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으로 충당되었으며, 고려 후기에는 2품 이상의 재추(宰樞)로서 임명된 사례도 적지않다.
자신이 관장한 문과에 급제한 사람과 좌주(座主)·문생(門生)의 유대관계를 맺기는 지공거의 경우와 같았다. 1388년(창왕 1)에 과거제도가 개혁되어 여러 명의 고시관이 과거를 관장하게 됨으로써 그 비중이 상대적으로 감소되었으며, 이는 조선 초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경국대전』 편찬 당시에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는 상시관(上試官)·참시관(參試官) 약간 명과 감시관(監試官) 한두명이, 전시(殿試)는 대독관(對讀官) 3∼5명과 독권관(讀卷官) 3명이 각각 주관하는 것으로 정비되면서 지공거와 함께 소멸되었다. → 지공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