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 제24대(1259~1274) 왕.
이칭
본명
왕식(王植)
초명
왕전(王倎)
일신(日新)
시호
순효(順孝), 충경(忠敬)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219년(고종 6)
사망 연도
1274년(원종 15)
본관
개성(開城)
주요 관직
고려 제24대 왕
관련 사건
개경환도(출륙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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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원종은 고려 후기 제24대(1259~1274) 왕이다. 친몽 정책(親蒙政策)을 추진하여 김준, 임연 등 무신 집정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임연을 사주해 김준을 제거하였지만 임연과의 갈등으로 폐위되었다가 몽골의 개입으로 복위되기도 하였다.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1270년(원종 11) 전격적으로 개경 환도(開京還都)와 삼별초 해산을 명하였고, 이로 인하여 삼별초의 난이 촉발되었다. 몽골에 대한 복속과 타협으로 원 간섭기(元干涉期)의 출발을 가져왔지만, 오랜 전란을 종식시키고 고려 국체의 유지, 보존이라는 현실적 선택을 했던 왕이다.

정의
고려 후기, 제24대(1259~1274) 왕.
가계 및 인적 사항

재위 기간은 1259년(원종 즉위년)∼1274년(원종 15)이다. 이름은 왕식(王植), 초명은 왕전(王倎), 자(字)는 일신(日新)이다. 고종(高宗)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안혜태후(安惠太后) 유씨(柳氏)이다. 비(妃)는 김약선(金若先)의 딸인 정순왕후(靜順王后)로, 충렬왕(忠烈王)순경태후(順敬太后)로 추존(追尊)되었다.

주요 활동

전란기인 1235년(고종 22)에 강화도에서 태자에 책봉되었다. 1259년 몽골에 입조(入朝)하였다가 고종이 사망하자 이듬해 4월 강안전(康安殿)에서 즉위하였다. 몽골에 입조한 것은 남송(南宋) 정벌전에 참여하고 있던 뭉케[蒙哥] 칸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뭉케의 사망으로 아직 제위(帝位)에 오르지 않은 쿠빌라이[忽必烈]를 만나고 귀국하게 된다. 1260년(원종 1) 비슷한 시기에 고려에서 원종(元宗)이 즉위하고 몽골에서 쿠빌라이가 세조(世祖)로 즉위한 것은 이후 여몽(麗蒙) 관계 변화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1260년에 왕자 왕심(王諶)을 태자에 책봉하였다. 1261년(원종 2) 태자를 몽골 세조에게 보내 아릭부카[阿里不哥] 평정을 축하하였다. 원종 역시 태자 때 몽골에 다녀왔고 태자를 몽골에 보내는 등 몽골에 성의를 표명해 원활하게 국교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해 강도(江都)에 동서학당(東西學堂)을 설치하였다.

1263년(원종 4)에는 홍저(洪泞) · 곽왕부(郭王府) 등을 일본에 보내 해적이 고려를 침범하는 것을 단속해 달라고 하였다. 1264년(원종 5), 몽골의 친조(親朝) 요구에 응하여 몽골에 입조하였다. 이에 대해 김준(金俊) 일파는 굴욕이라 주장하면서 반대하였지만, 대몽 관계를 악화시켜 전쟁을 재발할 필요가 없다는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이로써 김준이 일방적으로 대몽 강경 노선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고, 몽골의 지원을 받아 왕권을 회복하려는 원종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267년(원종 8), 감수국사(監修國史) 이장용(李藏用), 동수국사(同修國史) 유경(柳璥), 수찬관(修撰官) 김구(金坵)허공(許珙) 등에게 명을 내려 신종(神宗) · 희종(熙宗) · 강종(康宗) 3대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이듬해 1268년(원종 9)에는 개경 환도(開京還都)에 대한 몽골의 요구가 높아지자, 이를 둘러싸고 김준과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김준은 서울을 다시 진도(珍島)나 제주도와 같은 먼 곳으로 옮겨 몽골과의 재항전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원종은 이를 거부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임연(林衍)이 무인 집정자 김준을 살해한 무진정변(戊辰政變)이 일어났다. 이 정변은 원종이 배후에서 조정한 것이었다.

1269년(원종 10)에 태자 왕심을 몽골에 보내는 등 친몽 정책(親蒙政策)을 추진하였다. 위협을 느낀 임연은 원종을 폐위시키고 원종의 동생인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왕위에 올렸다. 그러나 몽골의 개입에 의하여 4개월 만에 원종은 다시 복위하게 되었다. 복위에 대한 하례를 명분으로 곧바로 몽골에 갔는데, 이때 몽골 세조에게 태자 왕심의 혼인을 청하였고 동시에 몽골 군대를 청병(淸兵)하였다. 이는 몽골 황실과의 혼인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이룩하려는 의도였다.

1270년(원종 11), 반몽 정책(反蒙政策)을 주도해온 임연이 등창으로 죽자 그의 나이 어린 아들 임유무(林惟茂)교정별감(敎定別監)에 올라 실권을 행사하였다. 그 해 원종은 태자와 더불어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개경 환도를 전격적으로 단행하였다. 임유무는 강화도를 거점으로 몽골과 최후까지 항전하려 하였으나 원종에게 회유된 홍문계(洪文系) · 송송례(宋松禮) 등 측근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한편, 강화도에서는 삼별초(三別抄)가 난을 일으키고 반몽 항전을 지속하였으나 이들은 1273년(원종 14)에 제주도에서 여 · 원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개경 환도 직후인 1271년(원종 12) 2월, 녹봉을 받지 못하는 관리들에 대한 대책으로 경기 8현의 전지를 분급하는 녹과전(祿科田)을 실시하였다. 설치 지역은 경기(京畿) 8현에 한정한 것이지만, 장기적 전란 이후 관리들의 경제적인 안정을 마련하여 체제를 안정화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몽골에 대한 복속과 타협은 원 간섭기(元干涉期)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오랜 전란을 종식시키고 고려의 국체를 유지, 보존한 것은 현실적 선택으로서 평가 받을 만한 점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순효(順孝), 원나라의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능(陵)은 소릉(韶陵)인데,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내동리에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원사(元史)』

단행본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대몽항쟁사』(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8)
김호동, 『몽골제국과 고려』(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논문

강성원, 「원종대의 권력구조와 정국의 변화」(『역사와 현실』 17, 한국역사연구회, 1995)
강재광, 「무인정권 후기 대몽관계 변천과 고려왕조 정체성 변화의 성격」(『한국중세사연구』 46, 한국중세사학회, 2016)
신은제, 「원종·충렬왕대 전민변정사업의 성격」(『한국중세사연구』 21, 한국중세사학회, 2006)
윤용혁, 「여몽전쟁 전란기의 왕권: 고려 고종과 원종」(『역사와 역사교육』 41, 웅진사학회, 2020)
이명미, 「몽골 복속기 권력구조의 성립: 원종대 고려·몽골 관계와 권력구조의 변화」(『한국사연구』 162, 한국사연구회, 2013)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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