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주(仁州)이다. 초명은 이인기(李仁祺)이며, 자는 현보(顯甫)이다. 중서령(中書令) 이자연(李子淵)의 6대손이며, 추밀원사(樞密院使) 이경(李儆)의 아들이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해 서경사록(西京司錄)·교서랑 겸 직사관(校書郎兼直史館)·국자대사성 추밀원승지(國子大司成樞密院承旨)를 거쳐 1253년(고종 40) 4월 대사성으로 국자시를 주관하였으며, 1256년(고종 43) 12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258년 12월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1260년(원종 1) 참지정사로 9월 과거를 주관하고 수태위 감수국사 판호부사(參知政事守太尉監修國史判戶部事)를 더하고, 1262년 12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가 되어 1263년 12월 수태부 판병부사 태자태부(守太傅判兵部事太子太傅)를 더하였다.
1264년 왕이 몽골에 입조할 때 수행하여, 해동현인(海東賢人)으로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귀국 후 왕을 잘 수행한 공으로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에 오르고 경원군개국백(慶源郡開國伯)에 봉해졌으며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더하여졌다.
1267년 몽골이 병부시랑 흑적(黑的) 등을 보내어 일본을 초유(招諭)하려는 데 반대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같은 해 10월 감수국사가 되어 동수국사(同修國史) 유경(柳璥), 수찬관 김구(金坵)·허공(許珙) 등과 함께 신종·희종·강종에 이르는 3대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정월 문하시중에 오르고 1269년 8월 절일사(節日使)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여러 번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1271년 정월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려 할 때 손위(遜位: 임금 자리를 내놓음)할 것을 권한 일로 면직되어 서인(庶人)이 되었지만, 이듬해 정월 문하시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경사(經史)에 밝고 음양(陰陽)·의약(醫藥)·율력(律曆)에 통달했으며, 문장에 능하고 불서(佛書)도 깊이 연구하였다. 몽골과의 외교에 공을 세웠고, 일찍이 개경 천도를 주장하기도 했으며, 이승휴(李承休)를 천거해 관직에 나아가게 하였다. 1275년(충렬 1) 시호를 문진(文眞)으로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