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릉은 북한 황해북도 개성특급시에 있는 고려 후기 제24대 원종의 왕릉이다. 1274년 원종의 사후 소릉에 묻혔는데, 조선 초기 수호군으로 관리토록 했으나 중종 대부터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현재 개성 룡흥리에는 5기의 고려 무덤이 있는데, 그중 소릉떼 1릉이 규모가 크고 4층단의 능제를 갖추고 있어 원종 소릉으로 여긴다. 소릉떼 1릉의 석물은 난간석과 병풍석, 1쌍의 석수, 2쌍의 문인석이 있다. 주검칸을 발굴한 결과 내부 중앙에는 관대가 있고 북벽은 회칠을 하고 십이지 생초가, 천정에는 별자리 벽화가 그려져 있다.
소릉(韶陵)은 북한 개성특급시 룡흥리 내동에 있으며, 현재 북한의 보존급 유적 제562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제24대 임금 원종(元宗)은 고종의 장남으로 1258년(고종 45) 왕을 대신하여 몽골에 항복하러 갔다가 고종(高宗)이 사망하자 귀국하여 1259년(원종 즉위년) 즉위하였다. 1268년(원종 9) 강화도에서 개성(開城)으로 환도(還都)하려 하였고, 1269년(원종 10) 태자(太子)를 몽골에 보내어 친몽 정책(親蒙政策)을 추진하였다. 이듬해에는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1274년(원종 15) 6월에 재위 15년만에 제상궁(堤上宮)에서 승하하여 그해 9월에 소릉에 장례 지냈다고 하였다.
오늘날 송악산 뒤쪽 룡흥리의 매봉은 439m의 낮은 산인데, 그곳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언덕 중턱 위에 남향하여 소릉떼가 자리잡고 있다. 소릉떼는 반월형(半月形) 구릉에 5기의 무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분포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1662년(현종 3)의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이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거하여 원종의 소릉이 개성부(開城府) 북쪽 15리에 있다는 것은 알려져 있는데, 표석(表石)이 없어 5릉 중 어느 것이 소릉인지는 불분명했다. 현재 규모가 크고 석물의 종류가 많이 남아 전하는 ‘소릉떼 1릉’을 원종의 소릉으로 여기고 있다.
‘소릉떼 1릉’의 영역은 약 2,400㎡ 정도가 보존 및 보호 구역이다. 능역(陵域)은 산기슭을 깎아내리고 그 경사면에 4층단으로 축조되었고, 현재는 많이 황폐해져 있다. 제1단 중앙의 봉분(封墳)은 정남향이며 지면 위에 기단석(基壇石)을 12각으로 깔아놓고 그 위에 병풍석(屛風石)을 세웠다. 1954년과 1963년의 조사 당시 봉토(封土)의 놓이는 330㎝, 직경은 10m였는데, 현재 봉토의 높이는 210㎝로 낮아졌다. 봉분 뒤로 곡장(曲墻)을 돌렸는데, 현재는 그때 쌓았던 돌들이 남아 있다. 병풍석은 1954년 이전에 보수할 때 거친 장대석(長臺石)을 2단으로 쌓아 높이는 약 1m로 축조했으며, 일부 구간은 잡석으로 보충하였고, 한 변의 길이는 270㎝이다. 병풍석의 면석(面石)에는 십이지 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어 있었으나 모두 마모되어 확인이 불가능하다.
병풍석으로부터 50㎝ 밖으로 그와 병행하여 난간석(欄干石)을 12각으로 돌렸다. 현재 난간 기둥은 난간 석주(石柱) 11개와 동자(童子) 석주 10개가 남아 있다. 난간 석주의 높이는 86㎝ 내외이며, 동자 석주의 높이는 약 40㎝이다. 난간석 위에 올렸던 원통형 난간 가로대는 모두 없어졌다.
1963년까지 봉분의 네 모서리에 석수(石獸)가 한 쌍씩 배치되어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 2구가 없어져 현재는 정면 양쪽과 서북쪽 모서리에 각각 한 쌍씩 6구만 남아 있다. 석호(石虎)의 높이는 54㎝ 내외, 얼굴 너비는 29㎝, 밑단의 세로 길이는 41.5㎝ 정도이다. 병풍석에서 180㎝ 떨어진 앞쪽에 장대석(長臺石)을 3단으로 축석하여 제2단과 구분하였는데 그 높이는 130㎝이다. 제1단 석축 가운데에 2열로 계단을 배열하였다. 3단에서 2단으로 올라오게 된 구조는 다른 능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며, 제1단 석축 양 끝에도 계단을 배치하여 2단에서 1단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제1층단 동서쪽 모서리의 큰 판석은 상석(床石)으로 여겨지며 제자리에서 벗어나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제2단에는 동서 양쪽 980㎝를 사이에 두고 문인석(文人石) 한 쌍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문인석은 양관(梁冠)을 쓰고 조복(朝服)을 입고 양손을 앞으로 모아 홀을 쥐고 있으며 대체로 두루뭉술한 편이다. 그 높이는 178㎝ 전후, 얼굴 너비는 30.5㎝, 어깨너비는 59㎝, 밑단의 너비는 60㎝, 두께는 40㎝ 내외이다. 제2단 석축에서 440㎝ 앞에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았다. 제3단의 동서 양쪽에는 제2단의 문인석과 일직선상에 한 쌍의 문인석이 마주 보고 서 있는데, 1954년과 1963년 조사 당시와 마찬가지로 동쪽의 문인석은 목이 부러져 있다. 서쪽 문인석의 높이는 180㎝, 얼굴 너비는 30.5㎝, 어깨너비는 59㎝, 밑단의 너비는 60㎝, 두께는 40㎝이다. 이들 문인석 또한 2단의 문인석과 마찬가지 형태이며, 체구는 통통하여 환미감(丸味感)이 있지만 조각 수법은 거칠다. 제3단에는 원래 석등(石燈)이 있었으나 언제 훼손되었는지 알 수 없고, 지금은 등개석(燈蓋石)만 방치되어 있다. 제4단에는 정자각(丁字閣) 터가 있다. 정자각 터의 정면 아래는 심한 경사지로서 절벽을 이루고 있다. 현재는 석축을 쌓고 돌계단을 배치했던 흔적만 남아 있다.
조선 초기에 원종은 원나라의 시호를 따라 충경왕(忠敬王)으로 불렸다. 1406년(태종 6)에 고려의 태조(太祖),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충렬왕(忠烈王) 및 공민왕(恭愍王)의 8왕이 묻힌 왕릉에 수호인(守護人)을 두도록 하였다. 이때의 태조 현릉(顯陵)에는 3호(戶)를, 원종의 소릉을 비롯한 나머지 7릉에는 각각 2호를 두고 매호에 전지 1결(結)을 주고, 부근에서 나무를 하거나 나물을 캐는 것과 불을 놓는 것을 금지하였다. 1432년(세종 14)에는 태조 현릉을 비롯하여 현종 선릉(宣陵), 문종 경릉(景陵), 원종 소릉에만 수호인을 두고 경작이나 땔나무 베는 것을 금지토록 하였고, 나머지 고려 왕릉은 개성이나 강화도 소재지 수령이 관리케 하였다. 1456년(세조 2)에 현종 선릉은 수호인 2호를 정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에 법제화하여 고려의 태조 이하 4위(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왕릉은 그 지방의 고을 수령이 해마다 돌보는 동시에 밭을 일구거나 나무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관리 제도를 수록하였다.
1508년(중종 3)에도 현종 선릉에는 묘지기 2호를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1534년(중종 29)이 되면 초목이 무성하여 고총(古塚)이 많아 위치를 알지 못하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覺)』을 참고하였지만 비석이 있는 태조 현릉 외에는 원종[충경왕]의 소릉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고려 왕릉이 방치되어 현종이 1662년(현종 3)에 태조 현릉을 비롯한 43개 고려 왕릉의 상태를 조사하였고 1710년(숙종 36)까지 지속적으로 조사하고 보존 대책을 마련하여 『여조왕릉등록』에 수록하였다. 특히 현종과 문종 및 원종의 경우 숭의전(崇義殿)에 함께 모셔져 있어 이들 왕릉을 비롯한 고려 왕릉에 대한 소재 파악에 주력하였다. 이를 통해 개성에 있는 고려 왕릉을 살펴 30여 개의 왕릉은 100보를 정하여 금표(禁標)를 하고 경작과 장례를 금하였다. 이때 현종의 선릉에는 50보를 더하여 150보를 한도로 금표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후 3년마다 1회씩 고려 왕릉의 상태를 간심하여 보고하는 것을 정례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숙종(肅宗), 영조(英祖), 정조(正祖), 순조(純祖)와 고종(高宗) 때까지 고려 왕릉에 대한 관리가 지속되었다. 1867년(고종 4) 57기의 고려 왕릉을 봉축하고 표석을 세웠으며, 이는 태조 현릉에 세워놓은 『고려현릉수개기실비(高麗顯陵修改記實碑)』에서 확인된다.
1916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1867년의 표석을 근거로 고려 왕릉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고려제릉묘조사보고서(高麗諸陵墓調査報告書)』에 기록하였다. 당시 보고서에 의하면 원종 소릉은 이미 도굴을 당하였고 석벽을 바른 회도 다 떨어졌다고 한다. 해방 후 1954년 북한의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에서 능침 외부를 조사하여 석물을 보강하였다. 1963년에는 주검칸 내부를 발굴하였는데 그 결과 남북 길이는 342㎝, 동서 길이 286㎝, 높이 237㎝이었다. 남쪽에 너비 170㎝의 문을 내고 한 장의 큰 판석으로 막았다. 바닥은 40×70㎝ 정도의 막돌을 깔고 회칠로 마감하였다. 주검칸 중앙의 관대는 막돌로 약 29㎝ 높이로 쌓고 회칠을 하였다. 관대는 길이 270㎝, 너비 131㎝이다. 북벽은 큼직한 화강석으로 7단을 쌓고 회칠을 바른 위에 벽화를 그렸다. 벽화는 약 1m 크기로 머리에 십이지 생초 관을 쓰고 조복을 입고 홀을 쥔 십이지 신상을 먹으로 그렸는데 거의 다 지워졌다. 천정은 3장의 큰 화강석으로 덮고 회칠을 한 다음 붉은색으로 별자리를 그렸다. 주검칸의 동서북쪽 모서리에는 도굴 구멍이 나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석수 2구가 없어졌다.
고려 제24대 원종 소릉은 원간섭기(元干涉期)에 해당되는 초기의 왕릉이어서 아직 고려 전기 왕릉의 능제와 규모를 엿볼 수 있다. 고려가 망한 이후 조선 초기 국왕들이 관심을 갖고 수호군(守護軍) 2호를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이미 중종 대에는 그 위치가 정확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62년(현종 3)에 위치를 고증하여 표석을 세워 그 위치를 표시하였고, 1867년(고종 4)에 세운 표석이 남아 있다. 현재 소릉에 해당되는 위치에는 5기의 왕릉이 연달아 위치하고 있어 북한에서는 이곳을 소릉떼라 부른다. 5기 중 소릉떼 1릉의 규모가 크고 능제도 잘 남아 있어 원종 소릉으로 여겨진다. 현재 병풍석이나 석수 및 문석인 등 석물이 유존하고 있으며, 주검칸 내부도 발굴하여 십이지 생초 벽화와 별자리 천정화가 있었다는 것도 밝혀졌으나 도굴로 인하여 출토 유물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