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제23대 임금.
이칭
본명
이공(李玜)
공보(公寶)
시호
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
순재(純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90년(정조 14)
사망 연도
1834년(순조 34)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조선 제23대 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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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순조는 조선 후기 제23대 임금이다. 재위 기간은 1800년부터 1834년이다. 정조와 수빈박씨 사이에서 태어나 바로 원자로 호칭이 정해졌지만, 왕세자 책봉은 11세인 1800년(정조 24)에 이뤄지고 같은 날 관례를 치렀다. 왕비는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로, 순원왕후이다.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1803년까지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행하였다. 1804년부터 친정하였는데, 1808년부터 1811년까지 국정을 주도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제23대 임금.
가계 및 인적 사항

1790년(정조 14) 정조박준원의 딸 수빈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공(玜), 자는 공보(公寶)이다. 순조는 태어난 당일에 바로 원자로 호칭이 정해졌으나, 왕세자 책봉은 11세인 1800년(정조 24)에 이루어졌다.

정조는 1800년 1월 1일 신료들에게 전례 없이 왕세자 책봉이 늦어진 이유를 원자가 많이 성취되기를 원해서 신중을 더했다고 하면서, 왕세자 책봉이 늦어진만큼 관례가례를 일시에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2월 2일에 집복헌 바깥채에서 원자의 관례와 책봉례가 행해졌다.

가례는 정조가 두 번째 간택까지 진행하고 사망하였으나, 정조가 이미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기로 정한 상태였다. 왕위에 오른 순조는 부왕의 상을 마친 후에 삼간택을 행하고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는 왕비에게서 문효세자, 명온공주, 복온공주, 덕온공주 등 1남 3녀를, 숙의박씨에게서 영온옹주 1녀를 두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1834년(순조 34)에 4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시호는 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이고, 묘호는 순종, 능호는 인릉이다. 묘호는 양자인 철종이 1857년(철종 8)에 순조로 개정하였다. 또한, 고종대한제국을 수립한 이후 1899년 황제로 격상 추존하여 순조 숙황제(肅皇帝)가 되었다.

주요 활동

순조는 왕세자로 책봉된 해에 11세로 왕위에 올랐으나, 대왕대비정순왕후가 4년간 수렴청정을 행하여 1804년(순조 4)에야 친정을 하였다.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가 이룩한 경제적 · 군사적 기반을 해체하고, 김구주(金龜柱)가 주도하는 벽파를 중심으로 정치를 하였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자, 정국은 국구인 안동김씨 김조순 가문과 순조의 외가인 박남박씨 가문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순조는 이들 외척 가문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국정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부왕인 정조의 탕평정치를 회복하고자 수렴청정 당시 처벌받았던 노론 · 소론 · 남인 정치 세력을 사면하거나 재등용하였다.

순조는 1808년(순조 8)부터 국정을 주도하면서 국정의 실체를 파악하려 애썼는데, 이 시기에 소대(召對)가 자주 행해졌다. 이해에 순조는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폐를 살폈다. 1809년 3월 윤음을 내려서 관찰사, 유수, 수령에게 민폐를 바로잡을 방안을 보고하게 하였다. 각도에서 올린 진폐 단자를 수합, 검토하여 순조에게 보고된 해는 1811년이었다. 순조는 암행어사를 자주 파견하여 관리의 득실과 백성의 질고를 파악하려 한 것이다.

순조는 서영보(徐榮輔) · 심상규(沈象奎)에게 『 만기요람(萬機要覽)』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이것 역시 나라의 재정 · 군제 · 토지에 관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인재 등용을 위해 친시 · 응제시 등을 비롯하여 각종 과거 시험을 자주 시행하였다. 또 안동김씨 가문에 집중된 군사권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군권을 확보하기 위해 무예청 군병을 증원하려 하였으나 반대에 부딪혀서 오위도총부를 강화하고 궁궐 호위의 의장을 정비하였다.

순조가 국정을 주도하려는 노력은 결정적으로 1811년 평안도 농민전쟁으로 한계에 부딪혔다. 더욱이 1811년(순조 11) 후반부터 1814년까지 여러 차례 병을 앓으면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병이 회복된 이후에도 순조는 정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외척 세력은 비변사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는데, 순조가 그들을 견제하면서 정국을 주도할 수 있게 도와줄 관료층이 형성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순조는 효명세자 익종에게 기대를 걸어서 그에게 정치적 분위기를 익히게 하고, 동궁 요속을 배치하여 대리청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육성하였다. 그러나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4년으로 끝나고 다시 친정하게 되었으며, 안동김씨 가문 중심으로 권력 질서가 재편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원전

『고종실록(高宗實錄)』
『선원계보기략(源系譜紀略)』
『순조실록(純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논문

최성환, 「순조대 전반기 정국 변동과 의리론의 추이」(『한국사연구』 180, 한국사연구회, 2018)
염정섭, 「순조대 초반 권농책의 시행과 양전 추진」(『역사교육논집』 50, 역사교육학회, 2013)
오수창, 「정국의 추이」, 『조선정치사 1800~1863』 상(청년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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