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장 ()

화성능행도 병풍 부분
화성능행도 병풍 부분
의생활
개념
천자(天子)나 왕공(王公), 그 밖의 높은 분을 모실 때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격식을 갖추어 세우는 병장기.
내용 요약

의장은 천자나 왕공, 그 밖의 높은 분을 모실 때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격식을 갖추어 세우는 병장기이다. 의는 위의를 뜻하며 장은 창이나 칼 같은 병기를 가리킨다. 의장 중에는 병기의 구실을 잃고 단순한 표지로 쓰인 물품들도 있다. 고려 시대에는 조회·절일·하례 때 의장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제도가 정비되어 의장의 격식도 대가·법가·소가 세 등급으로 구분하였다. 대가의장은 종묘·사직에, 법가의장은 문묘에, 소가의장은 성 내외에 거둥할 때 썼다. 『오례의』나 『속오례의』에는 왕비·왕세자, 대리청정자의 의장 규모와 제도도 실려 있다.

정의
천자(天子)나 왕공(王公), 그 밖의 높은 분을 모실 때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격식을 갖추어 세우는 병장기.
개설

의(儀)는 위의(威儀)요, 장(仗)은 창이나 칼 같은 병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흔히 기치창검(旗幟槍劍)을 늘여 세운다는 것이다.

천자의 나들이 때 수레와 말, 군사의 순서차린 행렬을 노부(蓾簿)라 한다. 이 제도는 진(秦)나라 때 이미 있었던 것으로, 장량(張良)이 박랑사(博浪沙)에서 창해역사(滄海力士)를 시켜 시황(始皇) 행렬의 가마를 철퇴로 치게 하였으나 빈 가마를 맞추어 실패하였다는 고사에서도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지만 이름은 한나라 때부터 나타난다.

격식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실제로 무장한 군인이 호위하게 하였던 것이기 때문에 군(軍)의 편제나 병기 종류와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노(蓾)는 큰 방패로, 무리를 통솔하는 데 쓰이던 것이며, 부(簿)는 군대와 위병이 갑옷과 방패로 장속하고 밖에서 호위하는 절차를 기록에 올려 준행하도록 한 것으로 이 둘을 아울러 노부라 이르게 되었다 한다.

의(儀)는 기거동작(起居動作) 및 언행(言行)의 기준이 되는 범절이라는 뜻으로, 많은 단어를 만든다. 예의(禮儀) · 의례(儀禮) · 의식(儀式)같이 널리 쓰이는 단어 외에 의위(儀衛)는 『송사(宋史)』 의위지(儀衛志)에 ‘문위지의무위지위(文謂之儀武謂之衛)’라고 하여 의장처럼 무장하여 호위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의장 중에는 이미 병기의 구실을 잃었거나 단순한 표지(標識)로 쓰여, 의기(儀器)나 의구(儀具)에 더 가까운 물품들도 있다. 의기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뜻에서 천문을 관측하는 기기류(機器類)의 뜻으로도 쓰인다. 의궤(儀軌)는 한 번 실시한 절차를 기록으로 남겨 다음에 기준으로 삼도록 엮은 책을 이른다.

그 밖에 의장에 쓰이는 의구류를 종류에 따라 의기(儀旗) · 의도(儀刀) · 의거(儀車) · 의마(儀馬) · 의식(儀飾) 등 무수히 동원하여 쓸 수 있다. 또 의식이라는 뜻으로 습의(習儀) · 의도(儀導), 표준이라는 뜻으로 의전(儀典) · 의절(儀節) · 행의(行儀) · 준의(○儀) 등도 흔히 쓰이는 말이다.

중국에서 천자가 자신을 누를 만한 권신(權臣)에게 내리는 최고 특전에 구석(九錫)이라는 것이 있는데, 석(錫)은 사(賜)의 뜻으로 윗사람이 내리는 것을 말한다.

구석은 이마(里馬) · 의복(衣服) · 악기(樂器 또는 樂則) · 주호(朱戶) · 납승(納陞) · 호분(虎賁) · 부월(鈇鉞) · 궁시(弓矢) · 거창(秬鬯)의 아홉 가지로, 『삼국지(三國志)』에도 명목만의 한실(漢室)에서 조조(曹操)를 위왕(魏王)에 봉하고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때 위왕을 봉한 책문(冊文)에 보면, 『춘추(春秋)』 좌씨전(左氏傳)에, 왕이 진문공(晉文公)에게 내린 것을 실은 대로(大輅) · 융로(戎輅)의 수레와 호위하는 호분군도 300명으로 되어 있다. 부월과 궁시도 『춘추』 공양전(公羊傳) 장공(莊公) 원년조에 이미 그 기록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고구려가 맨 먼저 중국과 교섭을 가져 당연히 그 영향을 받았겠는데 기록으로는 상고할 길이 전혀 없으며, 고분 벽화에 무장한 군인의 행렬이나 포장 씌운 우차(牛車), 일산(日傘)으로 보이는 것이 산발적으로 눈에 띌 뿐이다.

신라통일 후 급격히 당나라 제도를 수용하였고 관직과 복식, 주거에 고도의 규제를 가하고 있어 충분히 면모를 갖추었겠으나, 기록이나 유물로 밝혀낼 길이 없다.

고려시대의 의장

고려는 개국 당시 국사가 다난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신라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제4대 광종에 이르러서야 새로운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현종 때 난리로 문헌이 흩어져 그 자세한 것을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의종 때에 평장사(平章事) 최윤의(崔允儀)의 노력으로 왕의 면복(冕服)이며 여로(輿輅)와 의위, 노부와 백관의 관복제도가 비로소 정비되었다.

조회 · 절일 · 하례 때의 의장

전정(殿庭)에는, 수정장(水晶杖) 하나는 좌에 있고 월부(鉞斧) 하나는 우에 있으며, 도장(都將)은 각 2인이다(放角帽에 紫衣를 입고 帶를 매었다). 대산(大傘) 하나는 좌에 있고 양산 하나는 우에 있으며, 군사는 6인이다(皂紗帽子를 쓰고 紫色小袖衣를 입고 대를 매었다).

다음 한(罕) 하나는 좌에 있고 필(畢) 하나는 우에 있으며, 군사는 4인이다(衣帶는 앞과 같다). 다음, 장엄궁(莊嚴弓) 12에 장교 12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방각모에 자의를 입고 대를 매었다). 백갑대(白甲隊) 영도장(領都將) 2인(방각모에 자의를 입고 칼을 차고 기를 들었다), 장교 2인(의복은 앞과 같다), 군사 50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갑옷을 입고 작은 기창을 들었다).

은장장도대(銀粧長刀隊) 영장교 2인(방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대를 매고 칼을 차고 기를 들었다), 군사 10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立角帽를 쓰고 寶祥花衣를 입고 假銀帶를 매었다). 은골타자대(銀骨朶子隊) 영장교 2인(의복과 執物이 前隊와 같다), 군사 10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조사모자를 쓰고 자색소수의를 입고 대를 매었다).

흑간작자홍라호대(黑簳斫子紅羅號隊) 영장교 2인(의복과 집물이 은장장도대와 같다), 군사 10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紫冠을 쓰고 紅背子를 입고 綠羅汗衫을 입었다). 가서봉(哥舒棒) 20, 군사 20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입각모를 쓰고 寶祥花大袖衣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교상(絞床) 하나에 군사 2인(조사모자를 쓰고 자색소수의를 입고 대를 매었다), 필연안(筆硏案) 하나에 군사 2인이다(의복은 앞과 같다).

은구장(銀毬仗) 전성남반원(殿省南班員) 20인(紫色公服에 紅鞓을 하였다)이 좌우로 나누어지고, 위장(衛仗) 100인(방각모를 쓰고 자색 공복을 입고 皂鞓을 하고 杖子를 들었다), 중금반(中禁班) 영지유(領指諭) 2인(방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대를 매고 칼을 찼다), 행수(行首) 2인(의대는 앞과 같고 기를 들었다), 반사(班士) 14인(방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대를 매었으며, 8인은 칼을 차고 先排 6인은 彈弓을 들었다), 도지반(都知班) 영지유 2인(의대는 중금지유와 같다), 행수 2인(의복은 중금행수와 같다), 반사 10인(방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대를 매고 黑簳紅羅號斫子를 쥐었다)이 있다.

전상(殿上)에는 상장군(上將軍) 2인, 천우대장군(千牛大將軍) 2인이 모두 좌우로 나누어진다(방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홍정을 하였다). 천우비신장군(千牛備身將軍) 4인, 비신장군(備身將軍) 4인이 각각 좌우로 나뉜다(방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대를 매고 칼을 찼다).

전문 외의 의위는 상시(常時)의 의식과 같이 한다. 선마조회(宣麻朝會)에는 상장군 2인, 대장군 2인(자의를 입고 홍정을 하였다), 비신장군 8인이 전상의 좌우에 분립하고(자의를 입고 대를 매고 칼을 찼다), 중금(中禁) 18인, 도지(都知) 10인이 각각 전정의 좌우에 분립하며, 의위는 단지 양우산(陽雨傘) · 교상 · 필연안을 설비한다.

입춘인일에는, 모든 전문 외의 조회시 상장군 2인, 대장군 2인, 비신장군 8인이 전정 좌우에 분립하고 중금 18인, 도지 10인이 전문 내외에 분립하는데 모든 의주는 위의 의식과 같이 한다.

법가의장

선배대(先排隊) 영장군 1인(錦衣를 입고 대를 매고 長刀를 차고 기를 들고 말을 탔다), 장교 6인(방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대를 매고 칼을 차고 기를 들었다), 군사 100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자의를 입고 장도를 들었다).

청유대(淸遊隊) 영도장 2인(자의를 입고 장도를 차고 기를 들고 말을 탔다), 장교 10인(자의를 입고 대를 매고 칼을 차고 기를 들고 말을 탔다), 군사 200인(靑衣를 입고 同心을 하고 弢鞬을 차고 말을 탔다), 금오절충도위(金吾折衝都尉) 장군 2인(長紫色 갑옷을 입고 장도를 차고 기를 들고 말을 탔다), 장교 4인(의복이 앞과 같다), 군사 80인(도건을 차고 철갑을 입고 말을 탔다), 금오과의(金吾果毅) 장교 2인(복색이 前隊와 같다), 군사 80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甲騎가 절충대와 같다).

행루여(行漏輿)에 청도(淸道) 1인(揷角帽를 쓰고 자의를 입고 대를 매고 杖을 잡았다), 군사 8인(입각모를 쓰고 자색보상화의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태사국리(太史局吏) 2인은 좌우로 나누어진다(방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었다). 우후차비대(虞侯佽飛隊) 영장교 2인(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기를 들고 말을 탔다), 군사 48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도건을 차고 갑옷을 입고 말을 탔다).

방패대(防牌隊) 영도장 2인(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기를 들고 말을 탔다), 장교 6인(의복은 앞과 같다), 군사 100인(皮甲을 입고 작은 기창을 잡았다), 차비장교(佽飛將校) 2인(철갑을 입고 기를 들고 말을 탔다), 군사 24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말을 탔다).

전행수안마(前行繡鞍馬) 24필, 갑마(甲馬) 8필, 공군사(控軍士) 48인(입각모를 쓰고 자색보상화문대수의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경령전판관(景靈殿判官)은 길 가운데에 서고 청도 1인(삽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홍정을 하고 대를 매고 장자를 들었다), 군사 9인(조사모를 쓰고 자색소수의를 입고 대를 매었다), 행로(行爐) · 다담(茶擔) 각 1, 군사 4인(의복은 前行馬控軍士와 같다), 채라번(彩羅幡) 10은 좌우로 나누어진다.

군사 20인(입각모를 쓰고 繡抹額을 하고 幡色을 따라 대수의를 입고 銅鍍金帶를 하였다), 인장교(引將校) 2인(방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칼을 차고 기를 들었다), 황수번(黃繡幡) 10은 좌우로 나누어진다.

군사 20인, 인장교 2인(의복이 모두 앞과 같다), 청곡병대산(靑曲柄大傘)이 가운데에 있고, 청양산(靑陽傘) 2개는 좌우로 나누어진다.

공학(拱鶴) 8인(金畫帽를 쓰고 錦衣를 입고 대를 매었다), 평련(平輦) 1, 인가(引駕) 1인(방각모를 쓰고 금의를 입고 대를 매고 장자를 들었다), 호련도장(護輦都將) 2인, 장교 2인이 전후로 나누어진다(모두 방각모를 쓰고 금의에 대를 매고 장도를 찼다). 공학 32인(입각모를 쓰고 보상화문의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은구장(銀毬仗) 40, 전성남반원이 좌우로 나누어진다(자의공복을 입고 홍정을 하고 말을 탔다).

어갑담(御甲擔)이 가운데에, 황산(黃傘)이 좌에, 홍산(紅傘)이 우에 있고, 공학 8인(금화모를 쓰고 금의를 입고 대를 매었다), 초요(軺0x9452)가 가운데에, 인가 1인, 호군도장 2인, 장교 2인, 공학 18인(의대가 모두 奉平輦人과 같다), 은장장도대 영장교 2인(방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대를 매고 칼을 차고 기를 들었다), 군사 20인(입각모를 쓰고 보상화문대수의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교상 수관자(水灌子)는 하나씩 좌우로 나누어진다.

군사 4인(금화모를 쓰고 금의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국인(國印) · 서초보담(書詔寶擔)은 하나씩 좌우로 나누어진다. 중서(中書), 주보리(主寶吏) 1인(자의를 입고 조정을 하고 그 뒤를 배종한다), 군사 16인(입각모를 쓰고 자색보상화문대수의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부보랑(符寶郎) 1인이 우에 있다(공복을 갖추고 말을 탔다).

중위군기(中衛軍旗)는 좌에 있고, 군사 2인(갑옷을 입고 兜牟를 썼다), 공학군기는 우에 있고, 군사 2인(의복은 앞과 같다), 청룡당(靑龍幢) 2, 백호당 2, 주작당 2, 현무당 2, 홍수당(紅繡幢) 2가 좌우로 나누어진다. 군사 20인(입각모를 쓰고 수말액을 하고 대수의는 번색을 따르고 가은대를 매었다), 청당 10, 적당 10, 백당 10, 황당 10, 흑당 10이 좌우로 나누어진다.

군사 100인(복색이 앞과 같다), 인장교 2인(복색이 은장장도대 장교와 같다), 은골타자대 영장교 2인(의복이 앞과 같다), 군사 40인(금화모를 쓰고 자색대수의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은장장도대 영장교 2인(방각모를 쓰고 자색의를 입고 대를 매고 칼을 차고 기를 들었다), 군사 20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입각모를 쓰고 보상화문대수의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은작자홍라호대 영장교 2인(의복과 집물이 前隊와 같다), 군사 20인(紫羅冠을 쓰고 緋羅背子를 입고 綠羅汗衫을 입고 紫繡色肚를 하였다), 사극소기창대(絲戟小旗槍隊) 영장교 2인(의복과 집물이 전대와 같다), 군사 40인이 좌우로 나뉜다(철갑을 입었다).

은작자홍라호 4, 군사 8인(주갑을 입었다), 장엄궁 12인, 장교 12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방각모를 쓰고 금의를 입고 대를 매었다). 극번(戟幡) 4, 군사 8인(백갑의를 입었다), 한(罕) 1이 좌에 있고 필(畢) 1이 우에 있다.

군사 4인(금모자를 쓰고 금의를 입고 홍정대를 매었다), 정편승지(靜鞭承旨) 4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방각모를 쓰고 금의를 입고 대를 매었다). 절(節) 6, 정(旌) 2가 각각 좌로 나누어지고, 정절랑(旌節郎) 8인(자공복을 입고 홍정을 하고 말을 탔다), 수정장 1이 좌에 있고, 낭장 1원(員), 월부 1이 우에 있다.

낭장 1원(모두 방각모를 쓰고 금의를 입고 대를 매었다), 중금반 영지유 2인(방각모를 쓰고 금의를 입고 대를 매고 칼을 찼다), 행수 2인(자갑을 입고 칼을 차고 기를 들었다), 반사 36인이 모두 좌우로 나누어진다(자갑을 입고 칼을 차고 선배는 탄궁을 들었다).

도지반 영지유 2인(의복이 중금지유와 더불어 같다), 반사 20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방각모를 쓰고 금의를 입고 흑간홍라호작자를 쥐었다). 행수 2인(칼을 차고 기를 들었다), 홍수선 12, 공작선 4, 반용선 2, 승지 31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방각모를 쓰고 금의를 입고 대를 매었다).

공작산 2가 좌우로 나누어진다. 황산 1이 좌에, 홍산 1이 우에 있고, 군사 12인(금화모를 쓰고 금의를 입고 대를 매었다), 어견룡(御牽龍) 22인(금화모를 쓰고 금의를 입고 金塗銀帶를 매었다), 어로는 가운데에, 봉로도장(奉輅都將) 4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금화모를 쓰고 금의를 입는데 혹은 別將으로 충당한다).

내시관이 좌우로 나누어지고, 어궁전(御弓箭) 장군 1인이 가운데에 서고(금의를 입고 대를 매고 말을 탔다) 승제원은 장내(仗內)를 횡행(橫行)하며, 우산 2가 현무당 뒤에 있고 좌우로 나누어진다.

후행마 8필, 공군사 16인(입각모를 쓰고 보상화문대수의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좌상장군 1인, 우상장군 1인, 천우대장군 2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모두 금의를 입고 홍정을 하고 말을 탔다).

천우비신장군 4인, 비신장군 4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모두 자갑을 입고 장도를 차고 기를 들고 말을 탔다). 위신대 영도장 2인(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기를 들고 말을 탔다), 장교 30인(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기를 들고 말을 탔다), 군사 600인(갑옷을 입고 도건을 하고 말을 탔다), 백철갑소기창대(白鐵甲小旗槍隊) 영도장 2인, 장교 12인(모두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기를 들었다), 군사 200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

후전지응관(後殿祉應官)이 좌우로 나누어진다. 감찰어사 2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 가후(駕後)에는 금오절충도위 2인(피갑을 입고 칼을 차고 기를 들고 말을 탔다), 장교 4인(의복은 위와 같고 말을 탔다), 군사 80인(철갑을 입고 말을 탔다), 현무대 영도장 2인(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기를 들었다), 장교 6인(의복이 앞과 같다), 군사 200인(갑옷을 입고 翊衛鷹揚軍으로 충당한다), 태복마(太僕馬) 20필, 공군사 40인(모자를 쓰고 소수의를 입고 대를 매었다), 우산 20, 군사 20인(의복은 앞과 같다), 군사 80인(철갑을 입고 말을 탔다), 후전영장군 1(금의를 입고 홍정을 하고 대를 매고 칼을 차고 기를 들고 말을 탔다), 장교 5인(방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장도를 찼다)이 있다.

교묘(郊廟)에는 책축교서루자(冊祝敎書樓子) 약간이 노부적룡대기 다음 중도에 있고, 청도 1인(삽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장자를 들었다), 호루자(護樓子) 장교(방각모를 쓰고 비대수의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인가 교방악관 100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방각모를 쓰고 자공복을 입고 홍정을 하였다).

안국기(安國伎) 1부, 잡기 1부 각 40인이 좌우로 나뉜다. 고창기(高昌伎) 1부 16인이 좌에 있고, 천축기(天竺伎) 1부 18인이 우에 있고, 연락기(宴樂伎) 1부 40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 취각군(吹角軍) 1부 20인이 좌우로 나누어 모두 가전(駕前)에 있다(입각모를 쓰고 자색보상화문대수의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취라군(吹螺軍) 1부 24인은 가후에 있다(조사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가후 중도에는 태자 · 공(公) · 후(侯) · 백(伯) · 재신(宰臣)이, 좌에는 문반, 우에는 무반이 있다.

왕태자 노부의장

왕비나 태자 · 왕자 등에도 각각 체감하여 정한 제도가 있었겠지만 기록에는 왕태자의 노부 차례만이 올라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배대 영장교 4인(방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대를 매고 칼을 차고 기를 들었다), 군사 100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자의를 입고 장도를 들었다). 청도전리(淸道電吏) 8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방각모를 쓰고 장자를 들었다).

백한중기 2, 삼각수중기 2, 백사자중기 2, 추아중기(騶牙中旗) 2에 인장교 2인과 협군사 각 2인, 잡채기 20에 인장교 4인과 협군사 각 2인이 모두 좌우로 나누어진다(인장교는 모두 방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대를 매고 칼을 차고 기를 들었다. 군사는 모두 평건책을 쓰고 말액을 하고 비의를 입고 扞袴를 입었다).

은골타자대 영장교 2인(방각모를 쓰고 자의를 입고 대를 매고 칼을 차고 기를 들었다), 군사 20인(조사모를 쓰고 자색소수의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은장장도대 영장교 2인, 군사 8인(의복은 각각 은골타자대와 같다) 모두 좌우로 나누어진다.

행로 · 다담 각 1, 군사 4인이 중도에(입각모를 쓰고 보상화문대수의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교상 수관자 각 1이 좌우로 나누어지고 군사 4인(의복이 앞과 같다), 서함 필연안 각 1에 군사 4인(의복이 앞과 같다), 은작자대 군사 16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자라관을 쓰고 비라배자를 입고 녹라한삼을 입고 자수로 包肚하였다).

도지반 12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방각모를 쓰고 금의를 입고 대를 매고 작자를 쥐었다). 행수 2인(칼을 차고 기를 들었다), 중금반 10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행수는 기를 들고 선배는 탄궁을 들었다). 대산 2, 공학 4인(금화모를 쓰고 은대를 입고 대를 매었다), 청양산 2, 공학 4인(의복이 앞과 같다), 용반 지유 2인, 장교 8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금화모를 쓰고 금의를 입고 도은한 대를 매었다).

우산 2, 공학 4인, 다방 · 의방 군사 각 15인(청의를 입었다), 후옹마 2필, 공군사 14인(입각모를 쓰고 보상화문대수의를 입고 가은대를 매었다), 현무대 영장교 4인, 군사 100인이 좌우로 나누어진다(의복이 모두 선배대와 같다).

1301년(충렬왕 27)에 황산은 황제의 제도라 참월(僭越)하다 하여 홍산으로 바꾸고, 무도(舞蹈)와 경필(警蹕)의 예도 모두 제하였다가, 1304년부터 다시 황개를 썼다. 1390년(공양왕 2)에 중국 제도를 본받아 새로 의장을 장만하고, 의장 드는 사람들의 옷도 모두 푸르고 붉게 물들인 천에 금문(錦紋)을 그리고, 모자를 쓰거나 갓을 쓰게 하였다.

조선시대의 의장

조선이 건국하여 모든 제도를 정비하면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엮어 예절의 기본을 세운 것은 특기할 만하다. 당시 확립한 제도에서 의장(儀仗) · 배반(排班)의 격식은 대가(大駕) · 법가(法駕) · 소가(小駕)의 세 등급으로 구분된다.

대가의장은 종묘(宗廟) · 사직(社稷)에 행행(行幸)하는 가장 정중한 격식이고, 법가의장은 한 등급 낮추어 문묘(文廟)영희전(永禧殿)에 갈 때 쓰던 제도이며, 소가의장은 성 내외(城內外) 행행 때 쓴다 하였으니 능에 봉심 차 성 밖에 거둥할 때에도 이 제도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의장고(儀仗庫)에서는 대가 · 소가의 법도만을 갖추고, 법가의장은 오래 사용하지 않던 것을 영조 때 본래 제도를 도로 찾게 하였다 한다. 또 행렬에 동원되는 의물(儀物)은 전정(殿庭)의 인장(人仗)과 같다 하였으니, 의식의 경중을 따라 그 인원과 의물은 궁중의식에서 그대로 배열하여 썼던 것으로 보인다.

국조오례의에 나타나는 제도

① 대가의장 : 대가를 인도하는 것은 맨 먼저 부령, 다음은 한성부판윤, 그 다음은 예조판서에 이어 호조판서 · 대사헌 · 병조판서이다(장관이 사고가 있으면 차관이 하게 된다).

그 다음은 시위군 8대로, 제1대는 50인으로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검을 차는데, 그 2인은 장검을 쥐고 좌우로 나누어 서서 앞서 가고, 그 다음의 1인은 백기를 쥐고 중앙에 있고, 그 다음의 1인은 둑[纛]을 쥐고 백기의 뒤에 있고, 그 다음의 1인은 고(鼓)를 쥐고 왼편에 있고, 1인은 금(金)을 쥐고 오른편에 있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반주창을 쥐고 가는데 호군이나 혹은 진무(鎭撫) 1인이 무기와 제복을 갖추고 이들을 영솔한다. 여러 대들도 이에 준한다(內直 · 司尊 · 從事 · 步甲士 · 銃筒衛 외 군사와 시종관들은 모두 말을 탄다).

제2대는 장검을 쥐고, 제3대는 궁시를 차는데 나머지 대도 서로 걸러서 무기를 잡는 것이 이와 같으며, 뒤에도 이에 의방(依倣)한다(다만, 중군은 홍기를 쥐고 좌군은 청기를 쥐는 것이 다르다). 다음은 도성위 40대이고, 그 다음 각(角) 부는 사람 4인이 무기와 제복을 갖추고 중앙에 있어 좌우로 나누어 선다(2인은 중각을 쥐고 2인은 소각을 쥔다. 뒤에도 이에 의방한다).

우군절제사는 무기와 제복을 갖추고 중앙에 있는데 진무 2인이 이를 뒤따른다(무기와 제복은 절제사와 같다. 뒤에도 이에 의방한다). 총통위 300인이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기계를 가지고 여러 대의 밖에 나누어 있다. 다음은 우군 8대로, 제1대는 호용(虎勇) 2대, 제2대는 호분(虎賁) 2대, 제3대는 호익(虎翼) 2대, 제4대는 호아(虎牙) 2대이다.

그 다음은 중군 4대로, 제1대는 충무 2대, 제2대는 충좌 2대이다. 그 다음은 홍문대기 2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무릇 큰 기는 1인이 쥐고 2인이 이끌고 2인이 좌우에서 잡으며, 보통기는 1인이 쥐고 2인이 이끌며, 작은 기는 1인이 쥐고 1인이 이끄는데 모두 청의에 피모자를 착용한다), 홍개 2개가 중앙에 있어 좌우로 나누어 선다(각각 1인이 이를 쥐는데 청의에 자주색 두건을 착용한다. 繖蓋와 靑扇을 잡는 사람도 이와 같다).

다음은 주작기 · 청룡기가 각각 1개씩 왼편에 있고, 백호기 · 현무기가 각각 1개씩 오른편에 있으며, 황룡기가 중앙에, 금 · 고가 중앙에 있다(고는 왼편에서 2인이 쥐고 금은 오른편에서 1인이 쥔다. 모두 홍의에 피모자를 착용한다. 뒤에도 이에 의방한다).

다음은 주1가 좌우로 나누어 서는데 주작기가 중앙에 있고, 다음은 백택기 2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며, 고명(誥命)이 중앙에 있다(싣는 말이 1필인데 華氈으로 이를 덮고, 서리 2인이 좌우에서 잡고 부축하며 보마도 이와 같다. 길을 인도하는 10인이 청의에 자주색 두건을 착용하고 앞서 간다).

대보와 시명보 · 유서보 · 소신보가 각각 1개씩 차례대로 가고, 상서소윤 1인과 승 · 주부 · 직장 · 녹사 각 2인이 이를 뒤따른다(의복을 갖추기를 백관들과 같이한다).

다음은 삼각기 · 각단기 · 용마기가 각각 2개씩 좌우로 나누어 서는데 천하태평기가 중앙에 있고, 다음은 현학기가 1개인데 왼편에 있고, 백학기가 1개인데 오른편에 있으며, 각 부는 사람 6인이 중앙에 있어 좌우로 나누어 선다(2인은 대각을 쥐고 앞서 가고, 그 다음에 중각을 쥔 사람 2인이 가고, 소각을 쥔 사람 2인이 간다).

입장마 2필이 안장을 갖추고 중앙에 있어 좌우로 나누어 선다(각각 2인이 말을 끄는데 청의에 椶色笠 · 운혜를 착용한다. 뒤에도 이와 같다).

다음은 표골타자(豹骨朶子) 6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각각 1인이 이를 쥐는데 홍의에 피모자를 착용한다. 무릇 瓜 · 斧 · 畢 · 罕 · 鐙 · 刀 · 旌 · 節 · 幢 · 棒 · 斫子 · 龍扇 · 鳳扇 · 雀扇을 쥐는 사람도 이와 같다), 금과 고는 중앙에 있는데 입장마가 2필이며, 웅골타자(熊骨朶子) 6개가 좌우로 나누어 선다.

다음은 영자기 2개가 나누어 서고(이를 쥐는 사람은 홍의에 피모자를 착용한다. 금자기 · 고자기를 쥐는 사람도 이와 같다), 가구선인기(駕龜仙人旗) 2개가 중앙에 있어 좌우로 나누어 선다.

다음은 고자기 1개가 왼편에 있고, 금자기 1개가 오른편에 있으며, 입장마가 2필이다. 다음은 가서봉 10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는데, 벽봉기 2개가 중앙에 있어 좌우로 나누어 서고, 입장마가 2필이다. 다음은 금등 10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는데 군왕천세기가 중앙에 있으며, 입장마가 2필이다.

다음은 은장도 2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는데, 은교의가 중앙에 있고 각답이 이를 따른다(1인은 교의를 받들고 1인은 각답을 쥐는데 자주색 옷에 자주색 두건을 착용한다. 孟와 灌子를 쥐는 사람도 이와 같다). 다음은 금장도 2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며, 다음은 주작당 · 청룡당이 각각 1개씩 왼편에 있고 백호당 · 현무당이 각각 1개씩 오른편에 있는데 은관자 · 은우가 각각 1개씩 중앙에 있고, 입장마가 2필이다.

다음은 은립과 4개와 금립과 2개가 서로 걸러서 좌우로 나누어 서는데 금 · 고가 중앙에 있고, 입장마가 2필이다. 다음은 금횡과 2개와 은횡과 4개가 서로 걸러서 좌우로 나누어 서는데 은교의가 중앙에 있고, 각답이 이를 따르고, 입장마가 2필이다.

다음은 은작자와 금작자가 각각 4개씩 서로 걸러서 좌우로 나누어 서는데 주칠의 교의가 중앙에 있고, 각답이 이를 따르고, 청양산 2개가 중앙에 있어 좌우로 나누어 서고 소여가 중앙에 있다(봉담 30인이 자주색 옷과 흑색 두건과 학창의 · 홍대 · 청행등 · 운혜를 착용한다. 뒤에도 이와 같다). 다음은 한 1개가 왼편에 있고, 필 1개가 오른편에 있다.

다음은 모절 4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는데 소연이 중앙에 있다**봉담이 40인이다. 다음은 은월부 · 금월부가 각각 4개씩 서로 걸러서 좌우로 나누어 서는데 금 · 고가 중앙에 있고, 어마 2필이 중앙에 있어 좌우로 나누어 서고, 사복관 2인이 상복을 갖추고 검을 차고 이를 뒤따른다.

다음은 봉선 8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청개 2개가 중앙에 있어 좌우로 나누어 서며, 다음은 작선 10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는데 홍개 1개가 중앙에 있어 좌우로 나누어 서며, 다음은 용선 2개가 좌우로 나누어 선다.

사금 16인은 무기와 제복을 갖추고, 주장을 쥐고 좌우로 나누어 군사의 밖에 있으며, 총통위 300인은 무기와 제복을 갖추고 좌우로 나누어 별시위의 밖에 있으며(대가의 뒤를 옹위함도 이와 같다), 별시위 1,000인은 무기와 제복을 갖추고 좌우로 나누어 의장의 밖에 있다.

다음은 충의위 200인과 충순위 600인이 한 줄이 되어 무기와 제복을 갖추고 별시위의 안에 있으며, 다음은 내금위 100인이 무기와 제복을 갖추고 충의위 · 충순위의 안에 있으며, 다음은 보갑사 100인이 무기와 제복을 갖추고 철퇴를 쥐고 내금위의 안에 있다(별시위 이하는 대가의 뒤에 이르러 모두 횡으로 줄지어 가며 뒤를 옹위한다).

시신(侍臣)이 좌우로 나누어 충의위 · 충순위의 앞에 있으며, 내직별감 80인과 사준별감 80인은 모두 상복을 갖추고 좌우로 나누어 시신의 뒤에 있으며, 전부(前部)의 고취(鼓吹)이다. 대호군 2인이 상복을 갖추고 운검을 받들고 중앙에 있어 나란히 가며, 수정장 · 금월부가 각각 1개씩 중앙에 있다(수정장은 왼편에서, 금월부는 오른편에서 각각 1인이 쥐는데 청의에 자주색 두건을 착용한다).

다음은 중금 24인이 자주색 옷에 자주색 두건을 착용하고 좌우로 나누어 서고, 소천시 12인과 별감 40인은 모두 흑색 옷에 자주색 두건을 착용하고 좌우로 나누어 중금의 밖에 있으며, 홍양산 1개가 중앙에 있고(충의위 30인이 공복을 갖추고 걸어서 따른다), 은마궤 1개가 그 다음에 있고(1인이 쥐는데 청의에 흑립을 착용한다), 어연이 있다(봉담 60인이 자주색 옷에 흑색 두건과 학창의 · 홍대 · 청행등 · 운혜를 착용한다).

청선 2개는 중앙에 있어 좌우로 나누어 선다(보갑사 뒤에 있다). 다음은 내금위의 절제사 2인, 충의위 · 충순위 · 별시위의 절제사가 각각 1인, 운검을 찬 중추가 4인, 갑옷을 받든 상호군과 지팡이를 가진 대호군이 각각 2인, 궁시를 띤 호군과 몸을 방비하는 호군 각각 8인, 사복관 6인이 모두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검을 차고서 횡으로 줄지어 간다(절제사와 중추가 한 줄이 되고, 상호군과 대호군이 한 줄이 되고, 호군과 사복관이 한 줄이 된다).

현무기 1개가 중앙에 있고, 다음은 후전대기 2개가 좌우로 나누어 선다. 다음은 어의를 받든 내직별감 6인이 횡으로 줄지어 가고, 내시와 상의 · 내의관이 각각 상복을 갖추고 이를 뒤따른다(별시위의 뒤에 있다). 사금 4인이 무기와 제복을 갖추고 주장을 쥐고서 좌우로 나누어 군사의 밖에 있으며, 후부의 고취이다.

다음은 중군 제3의 의흥 2대인데 도진무와 중군절제사가 각각 모두 무기와 제복을 갖추고 중앙에 있으며(뒤에도 이에 의방한다), 진무 2인과 각 부는 사람 4인이 이를 뒤따른다. 다음은 승지 6인, 주서 2인, 사관 1인, 예조정랑 · 병조정랑 각각 1인이 이를 뒤따른다. 제4대는 웅무 2대이다.

다음은 종친과 문무백관이 있다(모두 조복을 갖춘다. 만약 조칙을 맞이할 때이면 상복을 입고 대가를 인도한다. 육인과 시신, 근시도 조복을 갖추기를 이와 같이 한다).

다음은 감찰 2인이 좌우로 나누어 서며, 다음은 의금부 진무 2인이 상복을 갖추고 좌우로 나누어 선다. 좌군 8대인데 제1대는 용무 2대, 제2대는 용양 2대, 제3대는 용기 2대, 제4대는 용분 2대이다. 다음은 각 부는 사람 4인이 앞서 가고 좌군절제사가 중앙에 있는데, 진무 2인이 이를 뒤따른다. 다음은 도성위가 40대요, 그 다음은 시위군이 8대이다.

② 법가의장 : 그 의물이 전정 반장(半仗)과 같다 하였으나, 오래 사용되지 않다가 영조 때 『속오례의(續五禮儀)』를 편찬하면서부터 다시 쓰였다.

③ 소가의장과 세장(細仗) : 배릉(拜陵)과 그 밖의 성 밖 거둥에 쓰는데, 그 의물은 이정(二庭) 소장(小仗)과 같다. 전향명사(傳香命使)의 노차의장(路次儀仗)을 세장이라 하는데, 성 밖에서는 다시 세장의 반으로 줄여서 쓴다.

기우제라면 농사를 숭상하는 처지에 비가 오기를 비는 제사라 모든 장식을 철저히 생략하게 되는데, 영조 8년(1732) 특명으로 대폭 줄인 절차는 다음과 같다. 육정기 각 하나에 청룡기 1, 황룡기 1, 백호기 1, 주작기 1, 현무기 1, 영자기 2, 봉선 2, 작선 2, 표골타 1, 웅골타 1, 은장도 1, 금장도 1, 은립과 1, 금립과 1, 은횡과 1, 금횡과 1, 은월부 1, 금월부 1, 모절 2, 정 2, 개 4 등이다.

속오례의에 나타나는 제도

영조 20년 진연(進宴) 때에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르도록 명하였으나 구제의 의장 145종 가운데, 청양산 2, 청룡당 1, 백호당 1, 주작당 1, 현무당 1, 은교의 1, 은각랍 1, 홍교의 1, 홍각랍 1, 은관자 1, 은우자 1 등이 모두 폐지되어 있어 기회에 조정 신하에게 명하여 『속오례의』를 편찬하게 하고, 모두 구제대로 배열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엽의 실제 의장제도는 상당히 간략하여 『국조오례의』에서 없어졌다는 의구들을 제하고 난 나머지였는데, 다시 그 제도를 찾았다 하더라도 본래의 그것과는 같지 않았다. 시대에 맞추어 전에 없던 조총(鳥銃)이 끼어 들었고, 고려시대 때는 거의 전원이 말을 탔던 것에 비교가 안 되게 말 탄 숫자가 줄어들어 사뭇 시늉만 남을 정도로 줄어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속오례의』의 대가의장은 다음과 같다.

도가(導駕) · 선상(先廂) · 훈국(訓局) · 마병(馬兵)(갑옷 투구를 갖추는데, 밤을 나야 할 때에는 戰笠에 戰服을 차린다)이 좌우로 갈라서는데, 교외에 나서면 다섯 줄로 오마작대(五馬作隊)한다.

다음 보군(步軍)과 삼위(三衛)가 좌우로 줄지어 가는 사이로 금군별장(禁軍別將)이 기치를 늘어세워 복판으로 가고, 다음 금군이 좌우로 줄지은 가운데로 둑 하나, 교룡기(交龍旗) 하나가 간다.

둑은 충찬위(忠贊衛) 1인이 상복을 입고 마상에서 받들며, 교룡기는 1인이 융복(戎服)을 입고 마상에서 받드는데, 군사 4인이 홍의(紅衣)에 피모자 차림으로 줄을 내린다.

병조와 도총부, 당하관 각 1인이 융복에 칼과 궁시를 차고, 선전관(宣傳官) 1인이 상복에 패검(佩劍)하고 따르며, 계속 가운데 줄로 어의례(御衣禮)에 이어 내시상의원(尙衣院) 관원이 상복을 갖추고 따른다.

이어 상서원(尙瑞院) 관원의 뒤, 소련(小輦) 좌우로 창검군(槍劍軍) 30인이 기복(器服)을 갖추고 줄지어 가고, 용선(龍扇)의 뒤로 내금위 2인이 융복 차림에 언월도(偃月刀)를 받들고 좌우로 서며, 시신 다음으로 무겸과 선전관외 전원이 상복에 패검하고 좌우로 갈라서며, 별군직(別軍職)이 전립 · 전복 차림으로 복판을 나란히 간다.

전부(前部) 고취(鼓吹) 뒤로 수문장 2원(員)이 운검(雲劍)을 받들고 가운데로 나란히 가며, 홍양산 다음으로 오위장(五衛將) 2인이 융복에 검과 궁시를 차고 나란히 가고, 다음 병조 · 도총부, 당상 · 당하관이 융복에 칼과 궁시를 차고 두 줄로 간다(입직 외 전원).

다음으로 별운검(別雲劍) 4인(2품 이상)이 융복에 운검을 차고 좌우에 갈라선 중간으로 은마궤 하나가 가며, 총관 2인이 상복 차림에 보검을 받들고 나란히 간다.

어련(御輦) 추패군(椎牌軍) 8인이 융복에 몽둥이[椎]와 방패를 들고 가전시위(駕前侍衛)로 좌우편에 갈라서며, 다음 군기시 별파진(別破陣)이 융복에 조총을 메고 좌우로 늘어선 뒤로 무예별감 60인이 흑철릭 자건(紫巾)에 조총을 메고 칼 차고 좌우로 늘어서고, 협련포수(夾輦砲手) 80인이 기복을 갖추고 무예별감 바깥쪽으로 걷는다.

의금부 당하관 4인이 상복 차림으로 나장(羅將)을 거느리고 포수 바깥 줄로 가며, 가전 · 별초(別抄) 30인은 전립에 전복을 입고 의금부 당하관 바깥으로 줄지어 가고, 가후 · 금군 50인이 전립에 전건으로 별초군 끝에 간격을 맞추어 금군과 가후 · 금군 바깥 줄로 갈라서 간다.

호위군관과 충익위 · 충장위(입직 외 전부)는 융복으로 금군 바깥 줄로 가며, 청선(靑扇) 둘이 어련 뒤로 따라 가운데 줄로 나란히 서고, 다음 내관 1인이 어궁시(御弓矢)를 받들고 복판을 간다.

후전대기(後殿大旗) 뒤로는 후부고취(後部鼓吹)요, 내시부 · 사복시 관원과 어의(御醫)가 각각 상복을 갖추고 서며, 승지 6원과 주서(注書) · 사관(史官) 각 2인이 모두 조복(朝服)으로 따르는 뒤로 창검군 30인이 기복을 갖추고 세 패로 갈리어 왔다 갔다 한다.

병조와 도총부 당하관 다음으로 약원(藥院) 제조(提調)가 복판으로 가고, 의금부 당하관 1원이 나장(羅將)을 거느리고 근방을 맴돌며, 후상(後廂) 보군이 세 줄을 지어 뒤따르며 시위한다(오직 보군만 있고 마군은 쓰지 않으며, 나머지는 原儀와 같다).

고종 때의 황제 위의

고종이 즉위 34년인 1897년에 황제위에 오르게 되자, 건원(建元)하여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고 의장 제도도 모두 걸맞게 개정하였다. 오랫동안 일개 제후국의 왕 규모에서 벗어나 일약 천자인 황제의 격식을 찾아 마련한 것이다.

어좌(御座) 뒤에 산선(繖扇)이 둘이요, 일산(日傘) 하나는 왼쪽에 세운다. 전내(殿內)에는 쌍룡적단선(雙龍赤團扇) 넷을 좌우로 갈라 세우고, 다음에 쌍룡황단선 넷, 구룡황개(九龍黃蓋) 둘, 취화개(翠華蓋) 둘, 홍화단선 넷, 청화단선 넷, 홍개(紅蓋)가 넷이다.

전각 앞으로는 금월부가 왼쪽에, 양산(陽繖) 수정장(水晶杖)이 오른쪽에 서며, 금교의(金交倚) 둘을 좌우로 갈라놓은 다음, 금관반(金盥槃) 둘, 금타호(金唾壺) 둘, 불진(拂塵) 넷, 휘(麾) 둘, 황휘(黃麾) 넷, 금로(金爐) 넷, 금수병(金水甁) 둘, 향로(香爐) 둘을 좌우로 갈라서 놓는다.

계하(階下)에는 왼편에 둑, 오른편에 용기(龍旗), 황룡대둑[黃龍大纛]을 오른편에 세우고, 금마궤(金馬闠) 둘을 좌우로 갈라 세우며, 표미창(豹尾槍)이 좌우로 각 15병이다.

그 다음에 청화방선(靑華方扇) 각 둘, 청도기(淸道旗) 각 하나, 표미창 각 둘, 사독기(四瀆旗)가 각 일곱이며, 그 다음으로 수(殳) 각 하나, 궁시가 각 둘, 금고기(金鼓旗) 각 하나, 청소기(靑素旗) 각 넷, 성(星) 각 하나, 수 각 둘, 궁시 각 둘, 자지개(紫芝蓋) 각 하나, 황구룡산(黃九龍繖) 각 넷씩이 늘어선 뒤로 명연기(鳴鳶旗)는 왼편에, 의봉기(儀鳳旗)는 오른편에 서고, 진로기(振鷺旗)는 왼편에, 공작기는 오른편에 선다.

이어 순사기(馴獅旗)는 왼편에, 운학기(雲鶴旗)는 오른편에 서고, 각단기(角端旗)는 왼편에, 백치기(白雉旗)는 오른편으로 서며, 서우기(犀牛旗) · 벽사기(辟邪旗)는 왼편에 서고 화충기(華蟲旗)는 오른편에 서며, 천록기(天鹿旗)는 왼편에 적오기(赤烏旗)는 오른편에, 출경기(出警旗)는 왼편에 입필기(入蹕旗)는 오른편에 선 뒤로, 좌우성(左右星)이 각 셋, 열수기(列宿旗)가 각 일곱, 월(鉞)이 각 하나, 오색화산(五色華繖)이 각 둘, 장수당(長壽幢)이 각 하나, 다음으로 자당(紫幢) 각 하나, 다음 예당(霓幢)이 각 하나, 의황창(儀鎤氅) 각 하나, 오장(吾仗) 각 둘, 월 각 셋씩에, 다시 오색화산이 각 넷, 장수당이 각 둘, 자당이 각 둘, 예당도 각 둘씩 선다.

이어 부문진무정(敷文振武旌) 각 하나에 진선납언정(進善納言旌) 각 하나, 의황창 각 둘, 오장 각 넷이 선다. 이어 천마기(天馬旗) · 주작기 · 상란기(翔鸞旗) · 적웅기(赤熊旗)가 왼편으로, 유린기(遊麟旗) · 황웅기(黃熊旗)가 오른편으로 서고, 오성기(五星旗)가 왼편에, 오악기(五嶽旗)가 오른편에 선 다음으로, 치미선(雉尾扇)이 각 둘, 극(戟)이 각 하나, 영기(令旗)가 각 하나, 백택기 각 하나에 정편(靜鞭)이 각 둘, 오색구룡산 각 넷에 이어 황곡기(黃鵠旗)는 왼편에, 황룡화개(黃龍華蓋)는 오른편에 선다.

다음 좌우로 공작선(孔雀扇) 각 넷, 난봉적방선(鸞鳳赤方扇) 각 넷, 교효포절정(敎孝褒節旌) 각 하나, 명형필교정(明刑弼敎旌) 각 하나, 행경시혜정(行慶施惠旌) 각 하나에 포공회원정(褒功懷遠旌) 각 하나, 어장이 각 넷에, 전면 문기(門旗) 둘씩을 갈라 세운다.

이어서 구룡황개를 좌우로 세우고 자방산(紫方繖) 각 둘, 적방산(赤方繖) 각 둘, 치미선 각 넷, 쌍룡적단선과 쌍룡황단선 각각 둘에 단룡적단선과 단룡황단선이 각각 넷씩이요, 홍등(紅燈) 각 셋, 금절(金節) 각 둘, 오색기 각 하나, 홍방산 · 청방산이 각 한 쌍씩에 공작선 둘씩을 좌우로 갈라 세운다.

또 홍등 두 쌍과 금절 한 쌍, 수자선(壽字扇) 한 쌍씩을 갈라 세운 다음에 월기(月旗)는 왼편에 일기(日旗)는 오른편에 서며, 청룡기는 왼편에 백호기는 오른편으로 오고, 우보당(羽葆幢) 한 쌍, 표미번(豹尾旛) 두 쌍, 용두번(龍頭旛) 두 쌍, 신번(信旛) 한 쌍, 강인번(絳引旛) 두 쌍, 입과(立瓜) 세 쌍, 와과(臥瓜) 세 쌍, 의도(儀刀) 세 쌍, 인장(引仗) 세 쌍에 수자선 네 쌍이 갈라선 뒤로 다시 우보당 한 쌍, 표미번 한 쌍, 신번 한 쌍, 강인번 한 쌍, 입과 두 쌍, 와과 두 쌍, 의도 두 쌍, 인장 두 쌍이 갈라 서고, 오운기(五雲旗) · 오뢰기(五雷旗) · 팔풍기(八風旗) · 감우기(甘雨旗)는 왼편에 서고, 백택기 · 현무기는 오른편에 오며, 극 넷이 좌우로 갈라선다.

음양오행설을 따라 동남중앙서북(東南中央西北)을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로 배정하여 중앙토를 나타내는 황색은 황제의 색깔로 간주, 수천 년 내 변방에서는 사용하지 못했던 것인데, 이제 비로소 마음놓고 쓰게 된 것이다. 지금도 덕수궁(德壽宮) 중화전(中和殿) 옥좌(玉座)의 어탑(御榻 : 龍床)이 누런 칠로 되고, 누른빛 의장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은 그 당시 제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노부는 천자나 왕만이 아니라 그럴 만한 사람은 다 절차를 차려서 지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례의』나 『속오례의』에는 왕비 · 왕세자, 왕세자로서 대리청정시 원자 · 원손 · 왕세자빈 및 황제 등극 후 황태자의 의장 규모와 제도가 모두 실려 있다. 다만 철두철미하게 체통을 중시하는 절차이기 때문에 각각의 정도에 따라 짐작하여 체감(遞減), 배용(排用)하므로 새로이 첨가되는 의물은 따로 없고, 얼마만큼씩을 깎아 줄였을 뿐이다.

개화 후의 배종

고종이 황제위에 등극한 뒤로, 양식 예복에 양복을 입고 수종(隨從)하는 제도를 병용하게 되었는데, 물론 구식 노부 때처럼 거창한 절차를 따르지는 않았다.

1898년 3월 칙명으로 내린 것은 다음과 같다. 행행시 배종관(陪從官)은 각부부원(各府部院)의 찬정 · 참찬 · 협판(協辦) · 의관(儀官) 중에서 각 1원 및 주임관(奏任官) · 판임관(判任官) 중에서 각 1원으로 한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속오례의(續五禮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감류함(淵鑑類函)』
『고려도경(高麗圖經)』
주석
주1

정축기 · 정묘기 · 정사기 · 정미기 · 정유기 · 정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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